다 떠난 뒤

독하게 맑은 날,

날씨라도 흐리면 사랑 어기차게 나무라며
다 떠난 뒤 혼자 남은 오늘
견디기 한결 쉬우련만

빛날 아래서
꾀바르게 거드는 삶 이미
논리성 상실상태

넉장거리하고 누워서
마음 하나에 마음 또 하나
투영시키며,
환치시키며,

현실 아무리 막막해도 삶의 터 긍정하여
자욱한 구름먼지 속
이명으로 캐스터네츠 울리는
박명의 시간 열린다

사랑하는 이유 줄줄 많으면
그건 사랑 아니다
진짜 사랑은
이유를 댈 수 없는 거

그래서 사랑은 욕망의 순수한 증여,
누구에게나 내재되어있지만
여전히 매우 예외적이고 특별한 이야기,

오늘은 그게 사랑이다 

 

- 시의 창 -

매일같이 이어지는 오늘이라는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시작되는 오늘이라는 날, 좋고 싫고를 따지지 못하게 그냥 열리는 오늘이라는 이 하루, 그 오늘이 오늘도 또 밝아왔다. 불과 내일이 되면 어제로 흘러가버리고 말 처지에, 구태여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안달하는 모양새가 참 얄궂다.

그렇다면 오늘은 그저 오늘로 인정해주자. 까짓 뭐 대순가? 어차피 하룻밤 자고나면 이름 잃어버리고, 그 잃어버린 자체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바로 다른 하루를 오늘이라고 우길 주제인 걸. 다 떠난 뒤에 조용히 남아서 읊조려보자. ‘오늘’은 정말 소중한 날이었다고.

‘고맙다’는 말, 또는 ‘감사하다’는 말. 우리가 살면서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있는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고보니 어렵지 않은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주는 입에 올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우리의 이웃들이, 자연이, 삶 자체가 모두 고맙고 감사한 인연의 연장선 상에 위치하는 신의 섭리인 것을, 우리는 애써서 외면하려고 한다.

‘고맙다’라는 말은 ‘남의 은혜나 신세를 입어 마음이 즐겁고 흐뭇하다’ 또는 ‘남이 베풀어 준 신세나 은혜에 대해 즐겁고 흐뭇하다’ 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다. ‘고마움’이라는 명사형을 만들어 쓸 수는 있으나, 이런 마음을 나타내는 명사는 없다. ‘고맙다’의 어근 ‘고마’는 원래 ‘신(神), 존경(尊敬)’이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고맙다’는 ‘존귀하다, 존경하다’ 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신과 같이 거룩하고 존귀하다, 신을 대하듯 존경하다’ 라는 뜻을 지닌 말이 ‘고맙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은혜를 베푼 상대방을 참으로 “신과 같이 거룩하고 존귀하게 생각합니다.” 라는 뜻이 될 것이다. 어마어마한 칭송의 말이 아닌가? “고맙습니다.”를 애용한다면,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사회, 서로 거룩한 신처럼 예우하는 사회가 금방이라도 도래할 것 같은 기분좋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감사’는 일본식 한자어다. 사전을 옮겨 보겠다. ‘かんしゃ 感謝’ ‘かん-しゃ[感謝] 감사, 복합어, ~さい[∼祭] 추수 감사절’ 이렇게 나와있다. 일본 발음으로는 ‘간샤’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여와 우리말처럼 쓰이고 있는 말이 ‘감사’인 것이다. ‘감사’는 명사이고, ‘감사하다’는 동사이다. 물론 ‘감사’, ‘감사합니다’는 일본어에서 파생되었지만, 하도 익숙한 단어라서 이 말과 이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요즈음 ‘감사’와의 결별론이 거세지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감사합니다.”를 “고맙습니다.”로 대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만, ‘감사’를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감사’는 ‘고마움’으로 바꾸어 쓸 수는 있지만, ‘감사장, 감사패, 감사절’ 등등의 단어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안이 아직은 없다.

‘감사의 마음’이라는 뜻을 가진 ‘사의 謝意しゃい’도 일본에서 쓰이는 한자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상당수가 일본식 단어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된 ‘우리말 사랑’ 운동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기존의 단어를 버리는 일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단어를 발굴하거나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거나 하는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될 수 있으면 서로 신처럼 떠받드는 말인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쓰도록 노력해 보아야겠다.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또는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참으로(대단히) 고맙습니다.”라는 표현을 좀더 자주, 스스럼 없이 사용하는 우리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어찌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는 데에 꼭 필요한 도움과 상호관계를 형성하는, 소중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다. 단지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만 삶에 있어서 중요한 영역이나 포지션을 차지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목소리 크고 말이 많은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쉽사리 형상이 들어나기 마련이다.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성이나 특성은 무시한 채로, 우선은 남들보다 먼저 본인의 입장이나 처지를 강변하려 드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쟎게 발견하곤 한다. 때로는 그로 인하여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필요 이상의 오해나 편견에 사로잡히게도 된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가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참된 미덕은 오히려 침묵에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강렬하고 진정한 의사 표현의 방법도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길고 장황한 사설이 설득력이 있는 게 아니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진심을 담은 눈짓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충분한 생각을 전달할 수 있고, 아주 좋은 결과를 도출해낼 수도 있다. “침묵이 금이다.” 라는 옛말은 틀리지 않는다.

예전 TV에 심심찮게 나오던 광고 중에, 그림자 아버지의 애환에 관한 영상이 있었다. 자녀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면서도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무런 불평이나 불만을 표시하지 못하는 현대판 아버지의, 유령을 닮은 비참함이 잘 묘사되고 있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이 짠하게 만드는 광고영상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엄마만 찾는 자녀들과 대화를 좀 해보려고, 전문가가 추천한 ‘대화의 기술’이라는 책까지 읽어가면서 준비를 하지만 도무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요즘 흔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부탁을 할 처지도 아니고, 오직 자녀들의 눈치만 보면서 짧은 대화라도 나누어보기를 기대하는 아버지의 자화상이, 마치 각색되지 않은 필자의 이야기인 듯도 해서 서글프기까지 했었던 기억이 있다.

오늘은 가정과 사회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첩경으로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겸양의 마음과 ‘침묵’을 지향하는 온순의 마음이 오늘 깨우쳐야 할 진리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공평한 오늘이라는 이 날, 우리는 최선을 다한 삶의 자세로 오늘을 장식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삶의 의미이며 영원한 존재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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