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칼럼니스트/지역전문가)
김문환(칼럼니스트/지역전문가)

1988년 호주의 한 금광회사 기술자들이 동부 깔리만딴 주 내륙지방인 부상(Busang) 지역을 탐사하던 중 부락민들이 사금(砂金)을 채취하는 광경에 주목하였다. 그 이듬해 이 호주 회사는 그 지역을 본격적으로 탐사하여 샘플링 검사까지 마쳤으나 경제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의 활동은 포기하였다. 그러나 유독 이 탐사그룹에 끼어있었던 필리핀 국적의 지질 전문가 마이클 구즈만(Michael Guzman)과 네덜란드 태생의 캐나다 국적자인 펠더호프(Felderhof)는 생각이 달랐다. 펠더호프는 캐나다로 돌아가 전직 몬트리얼 증권거래소 중개인이던 데이빗 월시(David Walsh)를 설득하여 월시 부인의 자금 25만 달러를 끌어들여 Bre-X사를 설립하고 곧 켈거리(Calgary) 증시에 상장시킨다.

1996년도는 부상지역 금광 이권을 둘러싼 로열 훼밀리 간의 한판 승부전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한 해였다. 1996년 3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캐나다 국적 소규모 광산회사인 Bre-X사가 동부 깔리만딴 주 부상지역에서 세계 최대급의 금광을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부존량은 최소 7천 2백만 온스이며 단가 400불로 계산하여 300억 달러의 가치를 창출한다고도 하였으니, 이는 당시 인도네시아 일 년 분 국가 총예산액에 가까운 수치였다. Bre-X사는 특별한 정치적 배경이 없는 기존 로칼 파트너들인 유숩 머루끄(Yusuf Merukh)와 샤꼐라니(Syakerani)를 대체하여 대통령의 장남 시깃(Sigit)과 합작하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컨설팅 용역비 조로 40개월 동안 매월 미화 백만 달러씩을 지급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였다. 이와 동시에 20억 달러의 개발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지분의 20%를 세계적인 금광회사인 Barrick Gold사나 Place Dome사에게 매각할 용의가 있다며 투자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캐나다 증시에 상장된 Bre-X사의 주식은 애초 주당 몇십 센트에 불과하던 것이 1996년 9월 9일에는 360달러까지 치솟는 기록을 세우자, 동년 11월 대통령의 장녀 뚜뚯(Tutut)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개발허가를 타사에게 발급하기 이전에 선수를 쳐 캐나다의 대형 금광회사인 Barrick Gold사와 합작으로 부상 지역 금광개발 입찰에 참여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정부는 꾼또로(Kuntoro) 광업청장의 권한을 일시 정지시키고 수자나(Sudjana) 동력자원부 장관이 직접 교통정리에 나섰다. 11월 26일 정부는 금광개발 참여사에 대한 지분구조를 Bre-X사 25%, Barrick Gold사 75%로 정하며 각각의 지분에서 10%씩을 정부에 할애할 것을 최후 통첩하였다는 내용이 매스컴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각본대로 진행만 된다면 바로 밑 남동생인 시깃(Sigit)에 대한 뚜뚯의 역전승이 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했던가? 공개입찰을 기대했던 또 하나의 대형 금광회사인 Place Dome사는 대통령의 두 자녀를 각각 내세워 밀실에서 이뤄지고 있는 이 같은 거래행태를 비난하며 토론토 주재 인도네시아 총영사관을 통해 항의서한을 발송하는 한편, 거의 Barrick Gold사로 기울어진 전세를 역전시킬 파격적인 방안을 모색하는데 골몰하였다. Place Dome사는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던 봅 하산(Bob Hasan)이라는 인물에 주목하였다. 뚜뚯과 시깃이라는 큰 산을 넘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대통령을 움직이는 일이며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봅 하산임을 간파하고 그에게 접근하게 된다. 봅 하산 입장에서도 밀실거래라는 국제적인 비난을 무마하고 대통령 두 자녀의 싸움을 말릴 수 있는 ‘해결사’의 역할을 해낸다는 명분도 들고 나왔다. 1997년 2월 18일 수자나 동력자원부 장관은 3페이지에 달하는 정부 발표문을 기자들 앞에서 낭독하고 있었다. 정부의 이 발표에 따라 그동안 후발 업체로 참여하여 JP Morgan사의 실사까지 받아가며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던 캐나다의 Barrick Gold사와 Place Dome사는 완전히 배제된 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버렸고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Bre-X 사도 결국은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Bre-X사에 배정된 45%의 지분이 외관상으로는 최대 주주로 보이지만 실상은 나머지 잔여지분 55%가 모두 정부 우호지분이었고, 특히 개발권(Operator)을 Freeport McMoran사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대통령의 두 자녀 뚜뚯과 시깃도 갑자기 등장하여 프리포트사와 연계된 듯한 대통령의 골프 동반자 봅 하산이라는 제3의 인물에게 여지없이 무너지며 노다지의 꿈을 접어야 했다. 미국 남부 도시 피닉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프리포트사는 1973년 이래 이미 파푸아 지역 그라스벅(Grasberg)에서 금광사업을 해오면서 인도네시아 정부와 깊은 유착관계를 맺어온 다국적 자원개발회사였다. 일 년 국가 예산에 맞먹는다는 ‘노다지’의 꿈도 곧 일장춘몽의 거품으로 날아가게 되었으니 수하르또 정권 붕괴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하던 1997년 3월 19일, 항상 새벽 3시에 기상하여 비밀리에 단독으로 샘플링 작업을 해왔던 마이클 구즈만은 Bre-X사의 기본 샘플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던 Freeport McMoran사에서 파견 나온 수석 지질학자인 데이빗 포터(David Potter)와 회동을 갖기 위해 동부 깔리만딴 주도 사마린다 지사에서 현장 작업장으로 향하는 헬리콥터에 탑승한 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돌연 깔리만딴 정글에 초개같이 몸을 내던지며 이 엄청난 음모의 비밀을 홀로 떠안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사건 발표라고는 “그가 표본 검사물을 바꿔치기하여 경제성 여부를 오도한 사기범이라는 것”이었으며 4일 후 야생 짐승들에 의해 거의 훼손된 채 얼굴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그의 시체를 정글 속에서 수습하여 마닐라로부터 날아온 그의 가족들로부터 신원을 확인받았다는 신문 보도 정도였다. 몇 달 후에 호주로 가족 이민을 떠날 계획이 되어 있었다는 근거를 들어 절대 그가 자살할 리 없다며 타살 의혹을 제기한 유족의 주장은 마이클 구즈만으로부터 12만 달러짜리 주택을 선물로 받은 고인의 젊은 현지처 가십에 묻혀 희석되고 말았다. 구즈만이 사망하기 6개월 전, Bre-X사의 주가가 캐나다에서 상종가를 치던 시점에 데이빗 월시 사장 부부는 개인주식을 이미 매각하여 2천만 달러를 챙긴 후였으며 기술책임자로서 매월 인도네시아를 오가며 구즈만을 지휘했던 존 펠더호프(John Felderhof)는 즉시 해고되었으나 1억 달러가 넘는 그의 주식을 모두 처분하여 케이만 제도(Cayman Island)에 4백5십만 달러 짜리 초호화 저택을 마련하고 국적을 이미 바꾸어 놓은 뒤였다. 1997년 5월 4일, 실사를 벌였던 공인 감사기관은 “부상 광산은 경제성이 없고 이에 대한 대규모 사기행각이 있었음”을 공식 발표하였다. 어수선하던 인도네시아 사회를 흡사 1800년대 후반 미국 서부의 ‘골드 러쉬’ 시대로 회귀시켜 놓았던 ‘인도네시아판 노다지 소동’은 희대의 사기극으로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구즈만이 탑승했던 헬리콥터의 조종사는 다름 아닌 전직 특전사 소속 요원이었다.

타이틀로 잡았던 상기 ‘희대의 사기극’이 단순히 사건 속의 추리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엄청난 사기, 음모, 정치적 공작의 팩트였슴을 입증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마이클이 헬리콥터에서 몸을 내던졌다고 하는 깔리만딴 부상(Busang) 주변 지역에서 관계 당국이 사체를 수습하여 후송 작전을 펼치고 있다. 원내는 8년 후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마이클 드 구즈만.
마이클이 헬리콥터에서 몸을 내던졌다고 하는 깔리만딴 부상(Busang) 주변 지역에서 관계 당국이 사체를 수습하여 후송 작전을 펼치고 있다. 원내는 8년 후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 마이클 드 구즈만.

필자 소개

►제2회 ‘세계한인의 날’ 대통령표창(2008), 민주평통의장상/대통령(2012)

►저서

『적도에 뿌리 내린 한국인의 혼』/자카르타 경제일보사(2013)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재인도네시아한인회(2020) →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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