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청해부대 18진(왕건함)에 설치된 예멘 대사관 임시 사무소의 모습. (사진/뉴시스) 
2015년 4월, 청해부대 18진(왕건함)에 설치된 예멘 대사관 임시 사무소의 모습. (사진/뉴시스) 

◈ 아라비아 반도 ‘요충지 아덴만’

(서울일보/소정현 기자) 수에즈운하를 나와 인도양으로 연결되는 지정학적 길목에 있는 예멘은 ‘아덴만의 여명’작전으로 유명한 ‘아덴’항을 중심으로 과거에는 중개무역을 해서 번성했었다.

아라비아 반도 남서부에 위치한 ‘예멘공화국’(Republic of Yemen) 북부는 사우디아라비아, 동부는 오만(Oman)이, 남부는 아덴만(Gulf of Aden), 서부는 홍해에 연한다. 수도는 사나(Sana)이다. 면적은 52만7968㎢(한반도의 2.4배), 인구는 3298만(2021년 세계은행),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701.71 USD(2018년 세계은행) 이다.

민족은 전 인구의 97.2%를 차지하는 아랍계가 1,700개 이상의 부족으로 형성되어 있다. 나머지는 소말리아인과 인도인, 유대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아랍어를 사용하며, 종교는 대부분 이슬람교(수니파 62%, 중부와 남부, 시아 자이디파 37%, 동북부)를 믿고, 기타 유대교와 기독교, 힌두교 신자이다.

우리나라는 1985년 8월 22일 북예멘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1987년 3월 공관을 개설하였다. 외교관계가 없던 남예멘과는 예멘통일 직전인 1990년 5월 17일에 수교하였다가 1998년 12월 공관이 폐쇄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예멘통일 후 외교관계가 승계되어 2007년 현재 상주공관이 개설되어 있다.

이 나라의 정체는 임기 7년의 대통령 중심제 공화제이며, 의회는 임기 6년의 단원제(301석)이다. 대통령은 ‘압드 라부 만수르 알하디’(Abd Rabbuh Mansur al-Hadi)이다. 하디 대통령은 1994년 10월 3일 이래 예멘의 부통령을 지냈다. 이어 2011년 6월 4일, 예멘 봉기 이후 반정부 세력의 대통령궁에 대한 공격으로 알리 압둘라 살레가 부상을 입은 뒤,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고 있었다.

‘하디’는 아랍 지역 최빈국인 예멘을 33년간 통치했던 ‘알리 압둘라 살레’(Ali Abdullah Saleh)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2012년 2월 대통령에 공식 취임했다. 그러나 하디 대통령은 후티(Houthi) 반군이 2014년 9월 수도 사나를 장악한 뒤, 2015년 3월 몇 주 간 하디. 대통령이 피신해 있던 남부 항구 도시 아덴을 압박하자 결국 예멘을 떠나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했다.

2018년 9월 14일, 법무부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은 제주 예멘 난민 신청자 23명의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발표했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예멘인들이 밝은 표정으로 청사를 나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2018년 9월 14일, 법무부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은 제주 예멘 난민 신청자 23명의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발표했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은 예멘인들이 밝은 표정으로 청사를 나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앞서 2015년 2월 6일, 예멘의 시아파 이슬람 후티 반군은 의회를 강제 해산시켰고, 이날 TV 성명을 통해 의회를 대신할 국가위원회는 551명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UN, 미국, 걸프 협력 이사회,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하디를 여전히 예멘의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 예멘 내전의 중심에 있는 후티 반군의 기원은 1994년 자이디 성직자의 아들 ‘후세인 바드레딘 알후티’(Hussein Badreddin al-Houthi, 1959∼2004)와 형제들이 ‘수니파 침투를 막자’며 청년 단체를 조직한 것이 후티의 기원이다.

이슬람 시아파 무장 단체 후티 반군은 주로 후티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4년 지도자 후세인 알후티가 정부군에 사살된 이후 예멘 정부와 내전을 벌여 2015년 1월 대통령궁을 장악했다. 그러나 옛 남예멘 지역의 지방정부들이 후티를 따르기를 거부하자 예멘은 내전 상태에 본격 돌입하게 된 것이다.

특히 2015년 3월 사우디는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등 수니파 국가를 규합해 후티와 맞섰다. 이 와중에 이슬람국가(IS), 알카에다 아라비아지부 등 무장단체가 난립하고 남예멘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남부 분리주의 운동까지 가세하여 예멘 전체가 아비규환에 빠졌다.

◈ 어렵사리 통일 ‘결국은 내전’

고대 향료무역의 거점으로 ‘축복받은 아라비아(Eudaimon Arabia)’라고 불렸을 정도로 부유했던 나라. 그러나 최근에는 내전으로 인해 800여만 명이 아사 위기에 놓일 정도로 위태로운 나라 예멘은 엄연히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되어 있다.

예멘의 자이드 시아파인 반군 후티와 아덴으로 피난한 원래의 하디 정부, 하디 정부를 지원하는 사우디 주도 연합군, 하디 정부와 갈등하는 남예멘 분리주의자들, 알카에다 등 테러집단과 정부 세력 사이의 뒤섞인 내전이다.

예멘 사다 지역 한 병원에서 심각한 급성 영양실조로 진료 받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 영양실조 위기를 겪고 있는 5세 미만 영유아 어린이는 약 46만 명에 이른다. (사진/뉴시스) 
예멘 사다 지역 한 병원에서 심각한 급성 영양실조로 진료 받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 영양실조 위기를 겪고 있는 5세 미만 영유아 어린이는 약 46만 명에 이른다. (사진/뉴시스) 

예멘은 1990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북예멘과 남예멘으로 나누어진 나라였다. 북예멘은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오스만 제국에서 1918년 독립했다. 후일 1962년 9월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이 쿠데타는 후에 대통령이 된 ‘압둘라 앗 살랄’(Abdulla as-Salal) 대령을 포함한 예멘 군장교에 의해 주도되었다. 군사혁명으로 예멘아랍공화국, 즉 북예멘이 건립된 것이다.

반면, 북예멘과 달리 남예멘은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홍해와 아라비아해를 잇는 길목으로 무역항 아덴이 있었던 남예멘은 1839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가 1869년 개통되면서 남예멘은 더욱 중요해졌다.

한 세기를 넘긴 영국의 남예멘 통치는 1963년 본격적인 반영항쟁으로 결국 영국이 철수한다. 이후 1967년 11월 급진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1970년 국호를 ‘예멘인민민주공화국’으로 바꾸었다. 친소련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이다.

그 이후 남예멘과 북예멘은 1970년대 국경 문제로 잦은 무력 분쟁을 벌이다 20세기 말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끝나면서 상호 합의 하에 협상에 의한 통일을 이뤘다.

1990년 통일을 이룬 예멘은 1990년 독일 통일사례와 1975년 베트남 통일사례와 비견된다. 1980년대에 남예멘과 북예멘의 중간 지대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통일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했다. 1989년 11월의 베를린 장벽 붕괴는 예멘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남예멘과 북예멘은 독일보다 한발 앞서 1990년 5월 22일 남북예멘 통일 선포 이래 예멘공화국 정부는 50:50의 권력안배원칙에 따라 행정부·의회 및 군부의 통합을 달성했다. 다만, 당초 1992년 11월 20일 이전에 총선을 실시, 신정부를 출범시킬 계획이었으나 남북예멘 당국 사이의 협상으로 총선이 1993년 4월 27일 실시되었다.

2018년 6월 30일, 제주도 예멘 난민 수용에 찬성하는 시민들이 서울 종로구에서 집회를 열고 인도척 차원의 난민 수용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018년 6월 30일, 제주도 예멘 난민 수용에 찬성하는 시민들이 서울 종로구에서 집회를 열고 인도척 차원의 난민 수용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새로운 예멘공화국은 북예멘 ‘알리 압둘라 살레’(All Abdulla Salish, 1947~2017)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남예멘 ‘알베이드’(Ali Salim al-Baydh) 사회당 당수를 부통령으로 하여 출범하였다. 수도는 북예멘의 수도였던 ‘사나’로 삼았다. 남예멘의 수도였던 아덴은 경제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또 북예멘 국가자문평의회와 남예멘 최고인민회의, 그리고 임명직 의원을 합쳐 301명의 통일 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통일예멘의 앞길은 험난하였다. 무엇보다도 국민통합에 실패하였다. 1993년 8월 북부정권이 남쪽의 발전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남북 간에 대립상태로 들어가고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1994년 5월 21일 다시 아덴을 수도로 하는 남예멘 독립을 선포하자 전면내전으로 확대되었지만, 같은 해 7월 4일 북예멘의 일방적 승리로 재통일되었다.

더욱이 인구의 56%를 차지한 수니파인 하디 대통령이 권력 공유에 실패했다. 군부 내의 살레 파를 제거했고, 6개 주로 구성된 정치에서 인구의 43%를 차지하는 시아파에게 단지 1개만을 배분한 것이다. 이런 차별성은 2015년 시아파 후티족의 쿠데타를 촉발시키게 된다.

◈ 사우디와 이란의 ‘본격 대리전’

2015년 3월 26일, 사우디아라비아가 주축이 된 반(反) 후티(Huthi)반군 동맹군이 예멘의 과도정부 수반 하디(Hadi) 대통령의 요청에 응하여 ‘결정적 폭풍 작전(Operation Decisive Storm)’이라는 이름으로 예멘의 수도 사나 소재 후시반군의 미사일 기지를 공습하면서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이 내전이 장기화된 핵심 이유는 지역 내 두 앙숙인 사우디(수니파 종주국)와 이란(시아파 종주국)이 각각 정부군과 반군을 지원하는 대리전쟁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란이 개입하자 사우디아라비아도 수니파 연합국을 구성해 정부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쿠웨이트, 카타르, 이집트, 요르단, 모로코, 세네갈, 수단과 동맹군을 형성하여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예멘 인구의 80퍼센트가 전쟁 난민으로 전락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레이시아를 거쳐 2018년 제주로 들어 온 예멘 난민은 대다수가 후시가 장악한 지역 출신이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2015년 3월부터 2018년 8월 사이 민간인 사상자 수를 약 1만7천 명으로 집계했다.

예멘인들의 삶은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예멘 전체 인구 가운데 약 1천800만 명은 다음 끼니를 어떻게 때워야 할 지 모르고 약 840만 명은 기아 상태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심각한 영양실조는 5세 이하 아동 40만 명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2023년 3월 11일 예멘 정부군과 후티 반군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나 유엔 중재 하에 포로 교환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전해진다. 예멘 정부군은 하디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군과 남부 수니파 부족민들, 그리고 분리주의자들로 구성돼 있다. 현재 후티 반군은 예멘 서부를, 그리고 정부군은 동부와 남부를 장악하고 있다.

이미 내전이 국제전 양상으로 비화한 국면에서 정부군이나 후티 반군 혼자 전쟁을 종결할 수도 없다. 몇 번 시도된 휴전협정에서 확인된 상호 불신까지 겹쳐 내전의 종결은 요원해 보인다.

2020년 12월 29일, 예멘 난민 출신 압둘라가 경기 수원역에서 노숙인들에게 나눠줄 케밥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2020년 12월 29일, 예멘 난민 출신 압둘라가 경기 수원역에서 노숙인들에게 나눠줄 케밥을 들고 이동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모카커피 본산 ‘시바여왕의 전승’

예멘의 서쪽에 위치한 모카(Mocha)항은 커피를 유럽으로 전파하는 17세기 무역의 중심지였다. 모카항의 명성이 컸던 만큼 아직도 사람들은 ‘예멘 커피’ 하면 자연스럽게 ‘모카(mocha)’를 떠올린다. 이 모카커피는 특유의 초콜릿 향으로 유명했는데, ‘모카커피’는 ‘초콜릿 맛’이라는 공식이 생겼다고 한다. 그 이후 모카커피는 예멘 원두를 사용하지 않아도 초콜릿 맛을 내는 모든 커피를 부르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또한 예멘은 구약성경의 ‘열왕기서(상)’에 나오는 솔로몬 왕과 시바(Sheba) 여왕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시바의 여왕이 아라비아 사막에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도시 유적이 예멘 북부 ‘루브 알 칼리’ 사막의 마리브 모래 밑에서 발견됐다고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가 2000년 10월 1일 보도했다.

시바왕국은 솔로몬의 시대에 아라비아반도 남쪽 끝, 오늘날의 예멘에 해당한다. 시바 여왕은 아라비아 남쪽과 홍해 건너편 에티오피아, 지부티(Djibouti) 국가 등을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시바의 여왕은 기원전 950∼930년경 이스라엘 왕국을 방문, 솔로몬왕의 아이를 임신한 뒤 자기 나라로 돌아가 아들 ‘메넬리크’ 낳았다. 그 후 메넬릭은 대(大)에티오피아 왕조를 건설했다.

성경에는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왕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방문한 것으로 돼 있으나 실제로는 시바 왕국이 독점해 온 해상무역로를 유지하기 위해 그에게 군대를 요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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