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문 환(칼럼니스트/지역전문가)
김 문 환(칼럼니스트/지역전문가)

기노시타가 후원한 일본여행에 완전히 매료되었던 수카르노는 틈만 나면 일본여행을 다녀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무상으로 받도록 되어 있는 청구권자금 2억2천3백만 달러가 12년에 거쳐 나눠 들어오게 됨에 따라 이에 대한 집행계획이 뒤따라야 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유입되는 자금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1959년 8월 '국가기획위원회(Dewan Perancang Nasional)'를 설립하였으며, 이 기구는 오늘날 경제개발계획 입안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국가개발기획청(Bappenas)으로 발전하였다. 1959년 6월 드디어 수카르노의 일본 공식방문 일정이 또 잡혔다. 그런데 이번 방문에 끼어든 '물주'는 기노시타가 아닌 도니치 보예끼(東日貿易)라는 회사를 이끌고 있는 쿠보 마사오였다. 기노시타가 기사 수상의 후원을 받았던 중견사업가였던 반면, 쿠보 마사오는 기시와 라이벌 관계이며 자민당 내의 거물들인 오노 반보꾸, 고노 이치로와 연계되어 있었다. 거기다 야쿠자 보스인 고다마 요시오까지 자신의 회사 등기부에 이름을 올려 놓았다. 즉 일본 정계의 정점에 서 있는 자민당 내 양대 파벌 보스 간의 힘겨루기나 다를 바 없었다. 일년 반 전 기노시타가 후원한 수카르노 일행의 국내 여행에 사설 경호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고다마 요시오의 입김이 작용하여, 영어 좀 한다는 이유로 쿠보 마사오가 기노시타 그룹에 끼어 들어가 기노시타의 상술을 염탐한 적이 있어, 이번 2차 방문에서 쿠보가 자신있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구보 마사오 등 뒤에는 전설적인 인물 세지마 류조가 소속되어 있는 이토추상사가 받쳐주고 있었다. 이번엔 공식방문이라 경호 문제 같은 예민한 사안은 없었지만, 어떻게 하든지 수카르노를 구워삶아 기노시타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수카르노와의 관계를 끌어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년 전의 '교토의 밤'을 아직 잊지 못하는 수카르노의 심리를 잘 헤아리며, 쿠보는 자신의 승부처로 도꾜 아카사카의 와국인 VIP 전용 나이트클럽인 '코파카바나'를 점 찍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돋보이는 에이스를 발굴해 낸 것이다. 방년 19세의 네모토 나오꼬(根本七保子)! 도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東京都立三田高)를 중퇴하고 낮에는 보험판매원, 밤에는 야간업소에서 부업을 하는, 패전국의 역경을 극복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전후의 일반 국민과 다를 바 없는 꿈 많은 소녀였다. 네모토는 수카르노 일행 앞에서 쿠보가 연습시킨 대로 온갖 아양과 교태를 부렸으며, 마이크까지 잡고 무대에 나가 인도네시아 전통가곡인 '벙아완 솔로(Bengawan Solo)'를 불렀다. 눈이 휘둥그레진 수카르노는 일본 엔카와 선율이 비슷한 인도네시아 가곡을 부르는 네모토의 천사 같은 모습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결국 수카르노는 자신이 투숙한 제국호텔에서 밀회를 즐기게 된다. 수카르노가 귀국하는 날, 쿠보는 네모토의 손을 이끌고 하네다로 나가 공항 전송대에서 손을 흔들며 수카르노에게 아련한 잔영을 심어 주었다. 그녀의 인생은 바로 이 순간을 계기로 하늘과 땅 차이가 되어, 그 여파는 후일 일본, 인도네시아 양국관계는 물론, 인도네시아 자신의 국가 운명을 가르는 기로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자카르타로 돌아온 수카르노는 도저히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네모토의 모습이 아른거려 도저히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인 수카르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네모또에게 ‘잠 못 이루는 자카르타의 밤'을 고백하며 연정을 담은 편지와 함께 주일대사관을 통해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보름간의 일정으로 발리(Bali)로 놀러 오라는 초대였다. 한편 자신의 작전대로 잘 돌아가는 상황을 인지한 쿠보 마사오는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빨리 대통령의 초청을 수락하라고 네모토를 채근하였다. 모친과 남동생을 위한 도꾜의 주택구입비 5백만엔, 여행경비 및 자카르타 주택구입비 5백만엔, 그리고 가족생활비 조로 매월 20만엔을 보장하고서야 쿠보는 네모토를 직접 데리고 자카르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일본 대기업 대졸 초임 월급이 1만엔 할 때였다. 쿠보는 네모토를 위장시키기 위해 두 명의 또 다른 일본인 여성을 자신의 회사직원으로 가장시켜 함께 들어오는 치밀함도 보이며, 1959년 9월15일 자카르타를 거쳐 발리로 날아간다. 발리 여행에서 돌아온 네모토는 수카르노의 설득에 못이겨 계속 자카르타에 체류하며, 자카르타 대통령궁과 지척인 멘뗑(Menteng) 지역에 임시 거처를 잡는다.

곤도 게이오의 저주

자, 이제 네모또 나오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으니, 곤도 게이오(일명, 가나세 사키꼬)의 기막힌 사연을 들어 볼 차례다. 수카르노는 네모또와 함께 2주간의 발리 여행을 마치고 자카르타에 돌아온 이후, 일년 전에 이미 입국해 있던 곤도 게이오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고심에 빠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곤도도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한 수카르노의 태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 말고 또 한 명의 일본 여성이 대통령 주변을 맴돈다는 사실을 확인한 곤도는 10월 3일 자카르타 자택에서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만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 된 마당에,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같은 고향 도꾜에서 온 여성이라니..." 심한 배신감과 굴욕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곤도는 스스로 자결이라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 대인이지만 충격적인 사고를 접한 수카르노는 당혹감과 비통함에 함몰되어 시신 옆에서 마냥 흐느껴 울기만 했다. 그리고 측근들에게는 철저한 보안 유지를 엄명하며, 가장 신임하는 경호실장 사부르(Sabur) 장군에게 극비리에 사체를 수습하도록 지시하였다. 사부르 장군은 몇몇 심복을 대동시켜 다음 날 한밤중에 자카르타 시내 블록 피(Blok P) 공동묘지에 곤도의 시신을 쫒기듯 매장하고 철저한 함구령을 내렸다.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적도의 나라로 날아와, 꿈을 펴보지도 못한 채 이국땅에서 한 줌의 흙이 돠어 버린 그녀, 얼마나 큰 원한을 품었기에 그로부터 몇 년 후 망령이 되어 다시 돌아왔을까?

주; 곤도(가나세)의 죽음은 위와 같은 맥락으로 자살로 알려져 있지만, 2015년 일본국내 니꼬니꼬 TV의 방영으로, 일본 야쿠자가 동원된 타살설을 비치고 있다. 그 배경엔 곤도와 네모토(데위)를 각각 후원하는 야쿠자 조직과 연계된 상사 간의 이권다툼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는 일본여성 두 명이 수카르노 주변에 머물게 되자 두 여인의 질투심과 경쟁심이 수카르노를 둘러싼 사생활이 노출되는 부작용을 우려해 야쿠자에게 청부살인을 의뢰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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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도네시아한국대사관 재외선관위원장; 19대, 20대 총선& 19대 대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동남아협의회(2009~2017)

▶제2회 ‘세계한인의 날’ 대통령표창(2008), 민주평통의장상/대통령(2012)

▶저서

‘적도에 뿌리 내린 한국인의 혼’/자카르타 경제일보사(2013)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재인도네시아한인회(2020) →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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