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칼럼니스트/지역전문가)
김문환(칼럼니스트/지역전문가)

1941년 12월 15일 일본군은 브루네이(Brunei) 지역의 세리아(Seria) 유전과 사라왁(Sarawak) 지역의 미리(Miri) 유전 및 루통(Lutong) 정유소를 점령한다. 이제 남은 목표인 자와, 보르네오, 수마트라 중 자와를 먼저 공격하게 되는 경우, 자와 이외 지역에 산재한 정유소 및 유전지대가 연합군에 의해 자폭될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먼저 특공대를 파견키로 작전을 세운다. 구메 세이치 대좌가 인솔하는 일본육군 최초의 공정부대인 육군 정진단(挺進團)은 1942년 1월 11일 동부 보르네오의 타라칸(Tarakan), 1월 23일 발릭파판(Balikpapan), 2월 14일 남부 수마트라의 팔렘방(Palembang)을 차례로 점령한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이 운영하던 BPM정유소는 무사히 접수하였으나, 미국계 스탠박(Stanvac) 소유의 NKPM공장은 80% 이상이 파손되어 복구하는데 꽤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제 자와 점령 주력부대인 제16군은 이마무라 히도시 중장이 5만 5천여 명의 대병력을 지휘하여 1942년 3월 1일 새벽을 기하여 자와 북부 해안선인 보조네고로(Bojonegoro), 에레탄웨탄(Eretanwetan), 크라간(Kragan) 촌락 3개 해안에 동시 상륙하였다. 그러나 바타비아(자카르타), 반둥, 수라바야를 최후 방어 거점으로 사수하던 네덜란드, 호주, 영국군으로 구성된 약 8만 명의 연합군은 불과 9일 만에 대부분의 자와 지역을 상실하였다. 3월 8일 이마무라 장군은 서부 자바 수방(Subang)시 인근의 칼리자티(Kalijati) 군용비행장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여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테르 포르텐(Hein Ter Poorten) 네덜란드군 육군 중장과 총독인 차르다(Tjarda)를 불러내어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며 익일인 3월 9일에는 영국군과 호주군 사령관의 항복까지 받아내게 된다. 네덜란드군이 항복한 날 저녁 시간, 네덜란드 총독부 관영 라디오방송 채널(NIRO)에는 “이제 방송국 문을 닫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더 좋은 시절이 올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여왕 폐하 만세!”라는 버트(Bert Garthoff)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로부터 열흘 후인 3월 18일 상기 방송국은 네덜란드 국가(Wilhelmus)를 마지막으로 내보내며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제16군사령부 헌병대는 이날 방송된 네덜란드 국가가 반일본적 선동이라는 이유로 방송부장 쿠스터(Kusters V. Kuding)와 실무자인 혹테(N.van der Hoogte)를 체포하여 4월 7일 자카르타 북부 안쫄(Ancol)에서 처형하는 잔인성을 내보였다. 그러나 자와 점령과는 달리 치열한 전투를 겪고 점령한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경험에 비추어 대본영과 남방군 총군사령부로부터 하달되는 군정 시책들은 강경일변도의 철권정책이었다. 제16군은 침공작전 시 동원하였던 5만 5천 명에 달하던 대병력을 만 5천명 선으로 대폭 감축하여 서부, 중부, 동부 자와의 3개 지역방위단으로 개편하여 방어형태의 작전개념으로 전환하였다. 이마무라 중장은 군정장관의 직분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최고사령관의 임무를 겸임하게 되며 제16군 참모장인 오카자키 세시부로(岡崎淸三郞) 소장이 군정감(軍政監)이 되어 인도네시아를 통치하게 된다. 우선 자바의 행정구역을 17개 슈(州)로 재편하는 과정에 구 식민통치국인 네덜란드의 상징성이 베어나는 몇몇 지역 명칭을 개칭하기도 하였다. Bantam을 Banten으로, Buitenzorg를 Bogor로, Batavia를 Jakarta로, Cheribon을 Cirebon로 개칭한 것이 바로 이때이다. 한편 이마무라 장군은 자와의 문화는 인근 국가와는 다른 무엇이 있음을 간파하며 강압적인 힘의 논리보다는 종교, 문화적 접근이 참작되어야 한다고 깨우치고 있었다. 우선 수카르노(Soekarno), 핫타(Hatta) 등 민족지도자들의 협력과 자와인들의 마음을 끌어내기 위해 국기게양과 국가연주를 허용함과 동시에 국어(Bahasa Indonesia) 사용을 인정하는 기본방침을 설정하여 초기 자와 군정을 펼치게 되자 대본영과 상급부대인 남방군 총군사령부로부터 강한 질책을 받는다. 이마무라 장군의 굽히지 않는 소신은 결국 본국과 마찰을 일으켜 제16군 사령관으로 임명받은 지 꼭 1년만인 1942년 11월 후임인 하라다 구마시키(原田熊吉) 중장에게 자리를 인계하고 자바를 떠나 과달카날 전투가 막바지에 이른 뉴기니, 솔로몬 전선을 관장하기 위해 신설된 제8방면군 사령관으로 전출된다. 후임 하라다 중장은 그 후 2년 4개월 동안 본국정책에 순종하여 철저한 자원착취와 만행을 자행하며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공공장소는 물론 여성들 앞에서 ‘훈도시’만 걸치거나 사케에 만취되어 폭행과 구타를 일삼는 외에 허리를 90도로 굽혀 천황이 거처하는 도꾜 방향을 향해 요배식을 강요하는 것은 유일신만 믿는 이슬람 정서와 율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었다. 이제 인도네시아 국민들 가슴 속에는 이마무라 장군이 바타비아에 입성할 때의 환영 무드는 급격히 사라지고 점차 일본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심이 잉태되어 그들의 폭정과 교활함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소위 로무샤(勞務者)와 세이넨단(靑年團)이라는 미명아래 강제 징용되어 버마, 솔로몬 지역까지 끌려나가 희생당한 수천 명의 젊은 목숨들, 급료 지불과 학업병행이라는 감언이설에 속아 끌려간 꽃다운 어린 소녀들의 파멸과정을 지켜보면서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수카르노, 핫따 등의 민족주의자들은 하루빨리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서둘러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며 이슬람사원을 중심으로 노골적인 저항운동이 전개되어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처형되거나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하였다.

아마무라 장군 스스로도 종전 때까지 솔로몬 제도에서 제 8방면군 사령관직을 끝까지 수행하다가 패전 후 전범으로 전락하고 만다. 자바점령 당시 200명의 호주군 대원들은 항복명령에 불복하여 동부자와 말랑(Malang)시 부근의 산속으로 탈출하여 저항을 계속하다가 한 달 후에 소탕되고 말았다. 이때 생포된 포로들을 대나무로 된 돼지우리에 가둬 적도의 땡볕 속에 화차(貨車)에 실어 운송하는 도중에 절반 이상은 갈증과 탈진으로 사망하였고 목숨이 붙어있는 나머지 포로들은 수라바야 앞바다에 내던져 상어 밥이 되도록 한 죄목에 걸려 1947년 5월 라바울(Rabaul)에서 개정된 호주 전범재판소에서 주둔군 사령관으로서의 포괄적인 책임을 물어 이마무라 대장에게 금고 10년 형이 선고되었다. 도꾜 스가모(巢鴨) 형무소로 이감되어 미군 점령군의 관리를 받다가 1954년 가석방되어 동경 자택에 은둔실을 만들어 칩거에 들어간다. 1960년대 초 재일교포 최계월 사장이 방위청장관을 역임한 중의원 의원 이노우 시게지로(伊能繁次郞), 서부 이리안 부족장 완마(Wanma) 등을 등기이사로 등재하여 동경에서 설립한 「興亞貿易株式會社」에 합류를 권유받았으나 이를 고사하고 오로지 과거 전쟁책임에 대한 속죄와 반성에만 몰두하며 순국 용사들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며 말년을 보낸다. 1915년 12월 도죠 히데끼를 11등으로 밀어내고 육군대학 제27기 수석졸업생으로 일왕으로부터 군도(軍刀)를 은사 받으며 논문발표회를 가졌던 영광의 순간이 눈에 아른거리며, 1935년 경성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남산자락인 용산지역에 주둔하였던 제40여단장 시절을 거쳐 파란만장한 일본 군국주의의 궤도를 따라온 그의 삶도 1968년 10월 4일 마침내 그 종착역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에 처음 언급되는 특이한 이름의 한국인 ‘최계월’, 그는 인도네시아와 어떤 인연을 맺었길래 전직 일본점령군 사령관과 함께 등장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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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한국남방개발(주)/인도네시아 현지법인(1977~2002)

교민 월간지『한인뉴스』논설위원(2010~2021)

제2회 ‘세계한인의 날’ 대통령표창(2008), 민주평통의장상/대통령(2012)

저서

『적도에 뿌리 내린 한국인의 혼』/자카르타 경제일보사(2013)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재인도네시아한인회(2020) →대표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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