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리 장사

 

나는야 고단한 보따리 장사

오늘은 이 학원

내일은 저 학원

글품 팔아 연명하는 떠돌이 강사 인생

 

입만 열면 훈계 충고 장황한 웅변,

그럴듯한 말치장 단정한 몸가짐,

정갈한 차림새에 유식한 척 고고한 척

미소 잃진 않지만

 

넌더리나는 만원 버스

아수라장 지하철, 떡시루로 시달리며

이쪽 끝에 저쪽 끝에 마다않고 돌아치는

구겨진 자존심, 꽁지 빠진 구관조

 

벗겨진 머리에 도리우찌 눌러쓰고

꾸부정한 허리춤엔 변함 없는 고뇌의 끈

고생처럼 얹혀있는

책 보따리, 말 보따리, 팔자 보따리

 

첫 새벽길 나서는 황혼 깃든 어깨엔

어느새 트레이드마크 되어진

검정 가죽 멜빵 가방,

터덜 터덜 발걸음에 햇살은 또 깃들고

시름 때문 느는 주름 눈시울 적시네

 

 

시의 창

산다는 게 참 좋게만 말하기 그렇다. 언제나 한결같은 소망으로 더 나은 내일을 기원하며 오늘을 버둥대지만, 막상 다시 열려지는 내일은 늘상 똑같은 모양새, 별 볼 일이 없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결론짓자면 참 뭣 같다. 그러나 어쩌랴? 다 알면서도 또 내일을 기다리며, 헛된 짓거리일 걸 뻔히 인지하면서도 판에 박은 소망 나부랭이에 꿈을 실을 뿐인 걸. 그래야, 그렇게라도 해야, 오늘을 견디고 살아낼 수 있으니, 어쩌면 더없이 처량하고 초라한 폼새에 모양 빠지지만 기왕지사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 아주 넋을 놓지는 말자. 지레 포기하고 삶을 함부로 낭비하지는 말자.

모르긴 해도 한 번은, 딱 한 번 쯤은 더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데, 만일 정신 안 차리고 있다가 그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그 뒤에 우리는 정녕 무엇으로 살까? 제아무리 길고 지루한 오늘의 이야기들도 지나고 보면 하냥 어제의 짧은 꿈이었을 뿐이니, 이미 가버린 사연일진대 붙잡고 버둥거려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허접하고 한낱 거품일지 모르지만, 다가올 내일은 그래도 우리에게 꿈과 희망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이라도 넌지시 건네주고 있지 않음인가? 바로 그게 정답이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 그 내일이 우리에게 삶의 의욕과 목표를 부여해주고 섰다. 그러니 힘겹더라도, 버겁더라도 오늘, 지금은 웃자. 웃으면서 참아보자.

얼추 30년 가량 전에 지은 시다. 운영하던 사업체가 잘못되고, 오갈 데 없는 처지지만 그래도 명색이 석사학위이니 학벌은 받쳐주는지라, 변두리 보습학원 몇 군데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냄새나는 오늘을 살아내던 시절의 절절한 고백이다. 당시에는 아직 오기도 남아 있었고, 호시탐탐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지라 아예 꿈을 송두리째 내던지지는 않았던 듯 싶다. 그러면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위기만 탈출하면 다시금 푸른빛 소망이 펼쳐지게 될 거라는 불확실한 미래에 운을 다걸기하고 있었을 게다.

물론 원치 않은 떠돌이 강사의 경력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인연과 인간관계를 발판 삼아 이내 다른 업에 도전하면서 학원가 ‘림삼선생’의 경력은 불과 수년 만에 종을 치게 되었다. 그리고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 헛헛한 웃음으로 살아 온 삶을 되새김한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 뒤로도 삶의 형편이 제대로 풀려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맹세컨대 필자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표본이었다. 그야말로 불굴의 의지로 버틴 삶이었다. 오히려 지난한 강사 시절이 그립고, 되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아련한 추억의 노트가 되어졌다. 아이러니한 과거지사다.

그렇다고 오늘 필자의 추억에 은근히 담겨있는 이 아픔의 기운이 체념이나 포기는 물론 아니다. 어차피 나이 들어 이미 황혼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이 현실에 별쭝난 희망이나 계획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아마도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꾀죄죄한 인격과 인품의 소유자로서 느끼는 애매한 자각이, 아쉬움과 그리움의 어중간한 중간 쯤의 상념을 부채질하고 있어서, 문득 달착지근한 회상의 시간에 푹 젖어 머물러 본다. 그래도 남겨진 오늘을 조금은 더 알차게 메꾸고 싶은 마지막 패기는 남아 있기에.

누군가 말했다. 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곱게 늙으라고. 젊은이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배척당하지 않으려고 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구태여 지적받으면서 살아갈 이유는 없다. 쓸 데 없는 자존심 내세워 호통이나 치고, 스스로 소외되는 영역을 애써 가꿀 필요는 없다. 늙어간다는 건 연륜과 경험이 쌓여간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석양볕이 더 뜨겁다는데, 아주 늦기 전에 후회 없도록 남아있는 모든 능력과 열정을 다 불태워보고 싶 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배우고 가꾸며 노력해야 한다. 혹시 아직도 부족한 뭔가가 있지는 않은가,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매진해야 한다.

3분 테스트, 예전 어느 워크샵에 갔을 때의 일이다. 프로그램 첫 머리에 한 교관님께서 자리에 모인 우리들에게 시험지를 나누어주며 3분 안에 풀라고 하셨다. 받아 보니 맨 위에 ‘끝까지 다 읽어보고 문제를 푸십시오.’ 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꽤 많은 문제들이 이어졌다. 교관님은 초시계를 꺼내 “5초, 10초.” 하며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문제라는 것이 고작 숫자를 쓰라거나, 동그라미를 그리라거나, 이름을 거꾸로 써 보라는 등 연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듯한 것들이었지만 누구 하나 의문을 제기하거나 투덜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의아해하면서도 째깍째깍 초침 소리를 의식하며 모두들 최대한 빠르게 연필을 움직일 뿐이었다. 3분이 다 되어갈 무렵 여기저기서 “앗!”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맨 끝 문항을 보는 순간 필자의 입에서도 절로 “어이쿠!” 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끝까지 읽어 보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문제를 풀 필요는 없습니다. 시험지에 이름만 쓰십시오.’

당혹해하는 우리를 보고 교관님은 말씀하셨다.

“시험지 첫머리에 끝까지 다 읽어보고 풀라고 쓰여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 급하셨나요? 내가 시간을 재고 있고 옆 사람이 열심히 푼다는 이유로 그 문제들을 서둘러 풀었나요? 남들이 다 탄다는 이유로 목적지도 모르는 기차에 올라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이 ‘3분 테스트’의 교훈이었다. ‘왜’ 라는 질문 없이 그저 바쁘게 움직이는 것, 방향 감각 없이 빠른 속도에 휘말리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이다.

젊은 시절에는 그저 자신의 열정과 넘치는 활력을 믿고 세상의 어떤 일에도 주저함 없이 도전하곤 했었다. 만일 실패한다면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오기도 있었고, 나름 실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배어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황혼의 햇살이 낯설지 않은 이즈음, 다시 생각해본다. 자신의 자존심과 자만심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주변의 모든 이웃들과 친인들의 협조와 이해가 만들어주는 성공과 성취의 열매를, 아무런 감사나 보은의 마음이 없이 따려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매하고 파렴치한 것인가를. 지금 필자의 어제와 오늘을 다시금 되짚어 조명해본다. 그리고 조심스레 내일을 예단해본다.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좁은 문 밖으로 아직은 길게 이어져있다는 것을...

 

저작권자 © 서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