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별

 

몸속 어딘가에서 마개 하나 뽑힌다

 

그곳으로

체온 쏴- 빠져나가고

식어가는 가슴 밑바닥에서

새들 파닥댄다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새다

 

허이연 벽지엔

좋았던 시절 기억 잔잔히 무늬져 흐르며

왠지

이름없는 고도에 홀로 남겨진 듯

외롬 몰려와

 

때론 남자도

아이처럼 엎드려 죽죽 울기도 한다

 

갈 곳 없는 자 절망 앞에

영혼 깃든 현의 노래는

타시락거리는 폭풍되어

삶의 절벽 그 끝 누울 때

하늘 더욱 까맣다

 

이 밤

별들은 내게 너무나도 멀다

 

시의 창

세상의 모든 이치는 불변인 것이 없다. 세월이 흐르다보면 절대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도 더러는 변색되어지고 만다. 오로지 ‘세상의 모든 진실은 변한다’는 진실만 변하지 않을 뿐이다. 어제의 슬픔이 오늘은 기쁨으로 바뀌고, 승리자가 순식간에 패배자로 변모하며, 성공과 실패가, 거짓과 참됨이,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역사가 언제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서 진실하게 대처할 뿐이어야 한다. 무릇 사람됨의 기본이 그것이다.

실존 분석의 거장 ‘롤로 메이 박사’가 지은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임상적인 경험을 통하여 현대인의 내면 세계를 깊이 관찰하고, 인간의 실존적 분석을 중심으로 인간의 창조적 양심의 문제, 죽음의 문제, 삶의 문제, 시간과 그 초월의 문제 등을 진지하게 다룸으로써,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자아의 발견과 진정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불안의 시대, 어지러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자아를 찾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인생의 가치와 목표를 찾기 위한 심층심리학적 분석을 제시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인간에 대한 지나친 분석적 접근을 지양하고 생의 존엄성, 윤리, 인생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저자는 인간의 심층심리에 대한 통찰을 비롯해 오랫동안 문학, 철학, 윤리학 등의 영역에서 탐구해왔던 과제 즉, 인간은 어떻게 불안과 위기에 대처하며, 이것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예리한 분별력과 깊은 판단력으로 현대인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소재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그의 눈에 비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컨대 불행하기 짝이 없다. 그가 바라본 현대는 경쟁과 이성을 강조하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그들의 자아를 쉽게 잃어버린다. 저자에게 자아는 역할의 총체가 아니라,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을 아는 능력이며, 자신의 잠재력을 발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불행을 느낀다. 그 불행은 불안과 고독이라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현대인은 자신의 존재성과 같은 가치개념이 위협받는다는 불안을 느끼며, 군중 속에서 보호받기를 바라는 고독을 느낀다. 이와 같은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건대, 어쩌면 자아를 잃어버린다는 표현은 옳지 못한 것 같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본래 자신이 갖고 있었던 것을 잃는다는 것인데, 자아의식이 단순히 ‘나’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관점에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자아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다른 시대의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연인들 간에 속삭이는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이 일삼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믿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사랑은 무엇인가를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식을 무척 아끼는 부모는 자식이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학교에서 하교하기가 무섭게 학원에 보내며, 소위 뺑뺑이를 돌린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연인들은 서로에게 “너는 내 꺼야.” 라는 말을 일삼으며 서로의 소유관계를 다시금 구두로 확인한다. 뿐만 아니라 명예, 돈, 권력 등의 수많은 물질, 비물질들이 현대인에 의해서 사랑받고 있다. 심지어 종교적 자세에서도 지나친 소유는 요구된다.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는 그들이, 주님은 내 안에 있다며 잠재적, 무의식적 신의 소유를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소유는 결국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상실감만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운명적 전단계이다. 무언가를 소유할 수 있음은 비로소 무언가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직감적으로 느끼는 인간들은 그로부터 불안을 느낀다. 따라서 우리 현대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소유하는 사랑이 아닌 믿는 사랑이다. 믿는 사랑은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믿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믿음을 더 이상 전제하지 않을 시점에 사랑은 끝이 난다. 이로써, 사랑하는 것 자체에 우리는 더욱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누군가를 내가 소유함으로써 내 소유인 사람이 제 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속을 끓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사람 자체로서 그 행동 하나를 믿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비록 그가 믿음을 저버린다면, 그래서 그것이 사랑을 하지 못할 만큼이라면 그 때 그와 나의 사랑은 끝인 것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계속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돈, 명예, 권력 모두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믿지 못해, 그저 소유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 이러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곧 사랑으로 직결된다. 비단 현대인들이 현대를 살아가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 괴리감이나 박탈감이 아니다. 언제 어디를 막론하고 인간의 존재가치는 사랑의 실천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사랑은 다시 믿음에서 시작된다. 또한 믿음은 진실한 마음을 열어주는 사랑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가치관은 동일선 상에 있는 것이다.

세상 일이 모두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중요할 것이 별로 없다. 돼도 그만 안돼도 그만인 남의 사정이니, 그 보다는 작은 일일 망정 내 일이 가장 소중하고 우선인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바꿔보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모두 나와 연관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사정이 곧 나의 사정이고, 그들이 맞닥뜨린 일들이 모두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라면, 과연 내가 사건 사고의 앞에서 무덤덤하게, 강 건너 불 구경 하듯이 바라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앞에 벌어진 일들이 내게 고통을 주는 시련이거나, 성공을 가로막는 난관이라고 해도 비단 나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럴 때 세상천지에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외롭게 헤쳐나가야 한다면 얼마나 고독하고 쓸쓸할까? 이렇게 막막할 때 손을 잡아주는 이웃의 작은 도움이 얼마만큼 큰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지 경험해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라는 격언처럼 고통스러운 짐을 나누어 들면 어렵지 않게 들 수 있는 것이고, 기쁘고 행복한 일은 나누면 배로 불어난다는 평범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져야 한다.

언제 어느 자리에 서 있던지 진실로 사랑을 실천하고 믿음을 실행하는 한결같은 자세가 요구되는 이유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주어진 기회에 이어서 다음의 선택에서도 다시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는 찬란한 지렛대이며, 혹시 현실적으로 성공의 대열에서 제외되었더라도 이번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다음번에는 반드시 승리하는 성공자로 기회가 제공될 영광스러운 첩경이다. 명심하자. 어차피 돌고 도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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