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어머니의 아들인가?

 

때로는 엇대인 인연으로

가없는 시절의 강,

그 강에 순종의 세월 흐르는데

 

깨알같은 그리움으로 쓰여진

당신의 육필일기를

나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요?

 

내 코에 불어주신 당신의 입김으로

나 비로서 호흡을 하였고,

내 피에 흘려주신 당신의 생명으로

나 이윽고 심장이 뛰었고,

내 입에 물려주신 당신의 젖꼭지로

나 마침내 성장을 하였고,

 

그러면서 나 예 이르렀거늘 -

 

오늘 생일날

당신의 왼 가슴에 달랑

시든 꽃 한송이 달아드렸다 하여,

오늘 생일날

당신의 창자 속에 꾸역

돼지국밥 곱배기 채워드렸다 하여,

오늘 생일날

당신의 속곳주머니에 쭈뼛

신사임당 두어장 찔러넣었다 하여,

 

나날이, 다달이, 연년이....

그렇게 시절 좇아

착실하게 잊지 않고 오그라든

당신의 그 세상이

되살아날 거라 여기는,

 

당신의 진자리가 마를 줄로 아는,

당신의 가시밭이 무뎌질 줄로 아는,

당신의 긴세월이 보상될 줄로 아는,

그렇게 믿고 싶은 내가

과시

내 어머니의 아들인가?

 

아니면 대관절 오늘은

누가 내 어머니의 아들인가?

 

- 시의 창 -

뜬끔 없이 효도 이야기로 시작노트를 열자니 은근히 뒤가 켕긴다. 누구라서 효도라는 명제 앞에 떳떳할 수 있으랴만은, 유독 필자처럼 불효막심의 극을 달린 인사라면 사실 쭈뼛거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아마도 불효에도 계급이 있다면 필자는 단연 지존급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효도를 화두로 삼는 까닭은 스스로에게 가하는 채찍질이다. 미상불 이제부터라도 생각을 좀 고쳐먹어보겠다는 바람이며 다짐이다? 이리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미안하지만 “아니올씨다.”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슬쩍 내심을 들여다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꼼수다. 고백컨대 단순하고 순진하게 진심어린 효성을 발휘하자는 게 아닌 것이다. 어차피 우리 어머니는 수삼년 전에 이미 하늘나라로 먼 여행을 떠나셨다. 효도 아니라 그보다 더한 어떤 걸 주워섬긴다고 해서 되돌아 오시지는 않을 터, 한이 맺힌 헛소리나 좀 주절거려 자신을 위로하고 합리화 시켜보자는 치졸한 계산이며 전략이다. 그렇게 잔머리의 복안이 심어져있는, 흑막이 복선처럼 깔려있는 칙칙한 오늘이다.

오랜 세월을 병석에서 모진 고생을 하시다가 어느 겨울날 훌쩍 곁을 떠나신 어머니, 이제 한달 쯤 지나면 어머니의 기일이 돌아온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 이맘때 쯤이면 유독 어머니가 그립고, 생전에 못 해드린 효도가 절절하게도 후회스러워진다. 오늘의 추천시는 대여섯해 전에 지은 시이니, 당시만 해도 아직은 어머니 모습을 눈으로 뵐 수 있었던 시절인데 왜 그 때 좀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이런 핑계 저런 이유 대면서 늦장을 부렸었는지, 이제사 생각하면 할수록 스스로가 너무도 바보같아 하염없이 눈물만 흐른다.

조선시대에는 벼슬보다 효도를 중히 여겼다고 한다. 영조시대 ‘나홍점’이란 사람은 과거에 합격한 지 25년이나 지났지만 어머니 봉양을 위해서 벼슬을 하지 않아 칭송을 받았다. 사람들이 벼슬을 권유하면 “어버이가 늙었는데 어찌 멀리 떠나겠는가?” 하고 대답하였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청산현감’으로 특별히 임명했으나, 이마저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조금은 어이없을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비록 현실 감각과는 차이가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이를 한갓 전설이나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지 말고, 효심발로의 한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효도나 부모공양 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사람들도 차제에 어느 정도는 감화를 받아야 할 것으로 여긴다. 이는 남들의 이목이나 체면치레를 염두에 둔, 효성을 빙자한 자기만족 보다는 실질적으로 부모의 입장에서 깊이 생각하는 언행이 필요한 바와도 일맥상통한다.

오늘날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팽배해진 물질만능과 이기주의는 사람의 근본 도리인 효를 망각하고, 자기편의가 낳은 유산들은 사회를 극도로 어지럽히며, 급기야는 패륜까지 서슴치 않으니 진정으로 걱정스럽기만 하다. 얼마 전 ‘민속박물관’의 ‘효열비각’ 앞에서 효자와 열녀의 기림글을 읽고 있었는데, 50대로 보이는 사람이 옆에 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효자로다. 정말 장하구나.” 하며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필자도 같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들 서넛이 지나가면서 감동 어린 찬사는 커녕 “효자 좋아하네. 열녀가 뭐 밥 먹여주냐?” 하고 히히덕거리며 무엄한 말을 큰 소리로 질러대는 것이었다. 도대체 가치관의 차이가 이렇게도 크게 다를 수가 있을까? 괘씸하기 짝이 없어서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망연자실했다.

이를 철부지의 발상이라고 체념하자니 통탄스럽고 격세지감도 유만부동이었다. 누구나 나이 먹게 마련이고, 노인이 되어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거늘, 이것이 어찌 몇 사람만의 삶의 이야기이던가? 그러나 청소년들의 탈선과 잘못된 사고방식을 바로잡아 윤리관을 심어줄 책임이 우리 기성세대에 있음이 자명하니, 한탄이나 호통 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원망하고 다잡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확실한 공식이나 제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실이라는 것도 보는 각도와 처해진 여건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다. 모든 만물은 양면성이 있다. 삼라만상에 양면이 있듯이 사람의 희노애락은 언제나 행과 불행을 동시에 공유하고 있다. 그것에 대처하고 순응하는 방법에 따라서 득실이나 성패도 좌우되기 마련이다. 어느 쪽을 내 것으로 삼느냐는 바로 본인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가정한다. 길을 가던 내가 잘못이냐, 거기 있던 돌이 잘못이냐 따져본다. 넘어진 사실을 좋은 경험으로 받아들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인생길을 가다가 넘어졌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길을 가면서 같은 방식으로 넘어지기를 반복한다면 분명히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가지고 싶은 건 한없이 많은데 주고 싶은 건 하나도 없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끝없이 먹기는 하는데 절대로 배설을 하지 않는 습성 때문에 뱃속에 똥만 가득 들어차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진실을 못 보는 것은 죄가 아니다. 진실을 보고도 개인적인 이득에 눈이 멀어서 그것을 외면하거나 덮어버리는 것이 죄일 뿐이다.

왜 사람들은 ‘행복을 잡기 위해서’ 라고 말하면서 한사코 행복의 반대편으로만 손을 내미는 것일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망각의 늪 속으로 사라져버릴 사람이 있고,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강기슭에 남아있을 사람이 있다. 혹시 우리는 망각의 늪 속으로 사라질 사람을 환대하고, 기억의 강기슭에 남아있을 사람을 천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때로는 하찮은 욕망이 우리를 눈 멀게 하여, 하찮은 사람과 소중한 사람을 제대로 구분치 못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으니 훗날 깨달아 통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모든 경우와 상황을 어우르게 하는 안목을 배우는 곳이 가정이며, 그 선생이 바로 부모다. 오늘 우리가 부모에게 행하는 효는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의 만 분의 일을 갚는, 아주 보잘 것 없고 작은 보은일 뿐이다.

그건 결코 생색 일도 우쭐댈 일도 아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랄 일도, 기꺼이 드러내 자화자찬 할 일도 아니다. 그저 묵묵히 하자. 그냥 꾸준히 걸어가자. 지쳐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 걸어가자. 돌에 걸려 넘어져도 또 일어나 앞으로 가자. 효도의 길은 끝이 없다. 막힘이 없다. 죽을 때 까지 후회없이 걸을 길이다. 효도란 그런 것이다. 바로 그런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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