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산 연가 

 

음산한 산주름 주르륵 박혀진 비탈

풋풋한 내음으로 피어난 야생화,

촘촘하니 들어선 야트막 황토밭

주먹돌 능선 밑 넓은 들녘 한가운데

 

반추하며 서있던 암소 한마리

유들유들한 넉살로 눈시울 흡떠보이는데

왼들짝 맞은편 괴괴한 정적속에서

기박한 자궁에 봄볕 아지랑이 들듯

엉덩이 살랑대며 에움길 돌아나오는

바람난 아낙네

 

가볍게 즈려밟는 발걸음에

야생화 꽃잎들 잘게 부서져나가고,

짚풀로 얽혀 엮어 옹골찬 동구미에는

주렁다발 대추알

훑어담아 쌓은 정분

 

품앗이 벌충하느라 땀흘리는 낭군 좇아

바위계곡 슬쩍 숨어

빠알간 떨림으로 익어가는데

 

살피듬 불끈 솟아 영각켜는 울부짖음

제 짝 찾아 부르던 황소

그악스런 악다구니조차

아스라히 잦아드는 산중턱 오솔길에

들릴락말락 살여울 소리

애잔한 외로움 덮으며 맞장구치고 섰네

 

시의 창 

흔히들 가을은 사랑이나 연가(戀歌)보다는 이별과 애가(哀歌)가 어울리는 계절이라고 여긴다. 미래에 대한 환상 보다는 지난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에 적당하고, 피어나는 들꽃 보다는 떨어지는 낙엽을 연상케 하는 절기에 적절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화창하고 따스한 양지녘의 햇살이 아닌, 웬지 적막하고 쓸쓸한 비탈길의 바람이 어울린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가을에는 헤어짐의 노래를 부르고, 그리움의 시를 쓰는 것이 맞다고 결론을 짓는다. 그렇게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가을은 뒹구는 가을로 영근다.

그래서 가을은 시끄럽지 않고 화려하지 않으며 자유분망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가을은 가을이라는 제목 아래 속박되어 있으며 고요한 달밤에 소박한 담채색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그래서 가을은 가을답게 스산하다. 가을은 가을스럽게 고즈넉하다. 그리고 가을은 가을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으로 보듬는다. 짧은 가을에 우리는 늘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는 이내 급히 가을과 함께 저물어간다. 다시 올 가을을 기다리며 우리의 가을은 먼 훗날을 기약한다. 가을에 맺어진 사랑은 그렇게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한 기억으로 붙박힌다.

가을이 왔다. 가을이다. 가을을 살고 있다, 우리는 지금. 형형색색의 산야가 조금씩 단조로운 갈색으로 변모해가는 자연의 분장술에 화들짝 놀라며 우리의 가을은 지금 한참 여물었다. 각자의 애틋한 사연과 살떨리는 이야기들을 소담스레 모아쥔 가을의 손아귀에 우리의 명줄이 온통 잡혀있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은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우리네 일상을 쥐락펴락 하면서, 뭇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면서, 파노라마같은 하루들을 쫙 펼쳐놓고 서있다. 능청스런 가을의 몸짓에 우리는 깜빡 속아서, 가을의 다감한 이 얼굴이 행여 우리를 배신할 리는 없다고, 언제나 곁에 머무를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지난 해에도 그 전 해에도, 아주 오래 전부터 가을은 우리를 배신하곤 도망을 일삼던 배신자다. 속임수에 통달한 전과자다. 너른 품으로 우리를 안아줄 것같은 모션을 취하다가는 순식간에 외면하고 제 갈 길로 가버리는 매몰찬 인정머리를 지니고 있는 차가운 품성의 녀석이다. 그걸 잊지 말자. 망각하면 안 된다. 혹여 올 가을만이라도 길게 곁을 주리라고 예감하고 있었다면 아서라! 가을은 애저녁에 우리의 것이 아니니, 먼 나라의 다른 가을바라기들을 위해 흘려보내주는 아량으로, 미덕으로, 잠깐 동안의 가을을 살면 되는 것이다. 아주 착하게, 선하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허락된 가을을 살면 그 뿐이다. 그러면 된다.

그렇다면 대관절 계절에 따라서 안성맞춤의 사랑법이라는 건 따로 있는 것일까? 가을에 어울리는 사랑이라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특별히 쿨하게, 시크하게, 아니면 아주 별쭝나게 요란스레 하는 가을사랑은 과연 존재하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는 최고의 마음 씀씀이다. 사람이 베풀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마음의 아량이 바로 사랑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계절에 따라서, 혹은 시기가 달라짐에 따라서 그 모양새가 달라질 수는 없다. 살아가면서 나눌 수 있는 최고로 존귀하고 고절한 마음의 쌓아올림이 사랑이니까 말이다.

일반적으로 지금 당장은 공짜인 것 같지만 결국은 알게 모르게 그 대가를 지급하는 상황은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대가가 오고 가는 거래나 인과관계에 의해서 맺어지는 인연이라면 당연히 그에 상응한 반대급부가 전제 조건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한정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사랑이라면 그에 반한 어떤 가치나 필요성이 대두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냥 주고자 하는 마음이 우러나온다면 주고 난 행위 다음에 받게 되는 기쁨이나 만족이 훨씬 많을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요는 주고받음이 아니라 끝없이 주는 것이다.

살다보면, 가끔 ‘너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다. “너 때문이다!” 어떤 원망이 묻어있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조심조심 생의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어느 한 순간 갑작스레 ‘너’가 보인다. “첨벙!” 캄캄한 하늘에 빠진다. 앞을 헤아릴 수 없는 안개 같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음의 헛디딤, 그건 너 때문이 아닌 나 때문인데, 아니면 너가 있음으로 인한 나의 아름다운 헛디딤, 너라는 존재가 사람이 되었든, 일이 되었든, 물질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너 때문에 내 삶이 아프고 외롭고 힘들지만, 너 때문에 내 삶이 기쁨과 소망이 되기도 하고, 너 때문에 내 삶이 온유와 인내와 절제를 얻는데, 너 때문에 내 삶이 유익하고 보람을 찾기도 하는데, 너 때문이다 라고 쉴 새 없이 누군가를 향하여 마음 아픈 원망만 하고 있을 건가? 그렇다면 오늘은 이런, 행복한 원망을 해보는 건 어떨까? “네 덕분이야!”

속절없이 이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이제 머잖아 오늘을 그리워하면서 가을 추억에 삼삼히 젖을 날 곧 올 게다. 기왕이면 그리움을 담아둘 수 있는 마음 주머니가 있었음 좋겠다. 미움 덩어리를 담아둘 수 있는 마음 주머니 하나 있었음 좋겠다. 끝없는 원망으로 하여 끓어오르는 불씨를 가두어둘 수 있는 마음 주머니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님의 얼굴도, 들어도, 또 듣고 싶은 님의 목소리도 담아둘 수 있었음 좋겠다.

먼 훗날, 마음 주머니 조용히 꺼내어 헤쳐 풀어보며 냉가슴 봄 눈 녹듯 스르르 녹아 내릴 때 그때는 말할 수 있으리. 모두가 사랑이었다고, 참으로 열심히 사랑하며 살았노라고, 참으로 사랑을 담아둘 수 있는 마음 주머니가 있었음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간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담아 넣고 싶은 것들이 있다면, 정말 작은 주머니 속에 소중히 담아 오래오래 간직하고 보관하고 싶어진다.

아픈 것도 아름다운 것도 모두가 가슴에 남는 추억이기 때문이다. 가끔 그립고 보고플 때 하나씩 꺼내어 자신을 뒤돌아보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지나온 세월 만큼 간직되는 보석이 되지 않을까 싶다. 흐린 날은 고요히 가라앉은 노래에 귀 기울이고, 비가 오는 날은 세상이 맑게 젖은 유리창 밖을 바라보고, 햇살 따스한 날은 눈부시게 빛나는 가을의 단풍잎의 향기에 취한다. 우리 사는 모든 날엔 바람이 불지만, 그 바람 끝에는 흐린 날과 맑은 비와 따스한 햇살의 향기가 골고루 담겨 있다.

늘 똑같지 않은 날에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 앞에 놓인 시름과 근심과 역경도, 지난 뒤엔 한 줄 그리움 되어 남게 된다. 모든 날은 아름답고, 모든 날은 그립고, 모든 날은 그래서 감사하다. 어두움 뒤의 밝음은 어두움이 있기에 더욱 그 밝음이 빛나고, 고난의 끝에 만나는 행복은 그 고난이 힘겨울수록 더욱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내게 주어진 힘겨움이 비 개인 후 신비롭게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사랑하는 그 님과 나, 우리에게 주어질 행복을 위한 서곡이라 생각하며 기꺼운 마음으로 극복해 내었으면 하고 바라는 하루다. 문득 가을 내음 물씬 빚어내는 가을비 오고 난 뒤 서늘한 날씨, 이렇게 가을이 하많은 사연을 익혀가면서 아주 천천히 곰삭아가나보다.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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