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서울일보DB)
(사진/서울일보DB)

가을이 오네요

 

여름 내내 서로 모르는 척

멀리 서서 눈치만 보던 가을이

은근짜 이 켠 넘실거리네요

 

처처에서 꼿꼿이 일어서

한껏 폭염 풍미하던 수목들

점차 수의(壽衣) 채비 갖추느라

나름 분주한 서녘 구릉어귀

 

휑하니 하나 둘 잎 떨구는

성정 조급한 녀석들,

언뜻 서늘한 바람 지펴올라

나무들 사이 돌다가

또 돌고, 다시 한 번 도네요

 

편편한 바위 때마침 게 있어

괴춤을 잡아끄니

못이기는 체 철푸덕

눈 감고 바람 소리 느껴요

 

살랑살랑 잘도 희롱하던

예전의 애교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옷자락이며 머리칼이며

닥치는대로 쥐어뜯으려는 바람

딴에는 몹시도 얄궂네요

 

그래도 하릴 몰라

제 놈하고만 놀아달라 칭얼대는

순수함 퍽도 좋아 소리내 웃지요

 

가을이 오는 거니까요

가을바람이니까요

그렇지요?

가을은 본디 가을 나름의 멋,

그건 바람만이 실어 나르니까요

 

여름 없고 가을 없어

계절이 하나 뿐인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들

얼마나 지내기에 지루할까요

 

여긴 다시금 소망 품는 날

지금은 새 계절이 열리는데요, 요 앞

가을이 오네요

 

시의 창

필시 절기상으로는 가을이 요 앞까지 와서 나풀거려야 함이 마땅하거늘 어찌 된 영문인지 솔솔 바람은 커녕 내리쬐는 폭염의 기세가 영 사그러들 줄도 모르는 데다가 때 거르지 않는 태풍 소식으로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대로라면 계절 때문에 모두들 노이로제가 걸리겠다.

도대체 가을은 언제나 오려는가?

정말로 야속하고 얄궂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더위에 짜증만 만땅이다.

그러니 어쩌랴?

늘어지고 있는 이 여름을 갈무리하고 오는 계절을 맞이할 채비는 어차피 슬슬 갖추어야 하는 것을.

게다가 올 추석은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겐지 하마 금주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으니, 조금 뻘쭘하긴 해도 어엿한 한가위요 중추절이렷다.

사 계절은 각각 저마다의 특징 있는 소리를 지니고 있다.

여름의 소리로는 ‘철썩 쏴아아아’ 하는 푸른 바다의 파도 소리가 제 격이고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도 제시할 수 있으며, 가을의 소리로는 ‘바스락’ 거리면서 길 위를 구르는 낙엽의 소리가 단연 으뜸이다.

겨울의 소리로는 ‘뽀드득 뽀드득’ 하는 눈길의 발자국 소리와 ‘씽씽’ 부는 매서운 칼바람 소리가 어울린다.

그렇다면 봄의 소리로는 어떤 것이 가장 합당할까?

그런데 얼른 생각나는 소리가 없다.

산과 들에 지천으로 피는 형형색색의 봄꽃들과 상큼하게 햇살 부서지는 벌판의 파릇파릇한 초록 물결 등으로 보여지는 시각적 특징은 금방이라도 여러 가지로 묘사할 수 있겠으나 들어야 하는 청각적 특징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을 듯 하다.

그렇담 개구리가 뛰쳐나오는 형상을 표현하는 ‘팔짝팔짝’은 어떨까?

나비가 날아다니는 모양새인 ‘나풀나풀’도 소리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아른아른’은 소리의 가능성이 영 없는 건가?

아니다.

다 아니다.

봄의 소리는 단언컨대 밖에서 귀를 통해 들려오지 않는다.

봄의 소리는 우리의 안에서, 저 깊은 속내에서부터 울려나온다.

마찬가지로 가을의 소리도 그저 막연하게 낙엽에서만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가을은 우리의 생각보다 퍽이나 깊고도 그윽하다.

비록 짧게 왔다가 금세 스러질 망정 그 가을이 지니고 있는 소리는 결코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가을은 봄 못지 않게 우리에게 새로운 생동감과 활력을 준다.

여름내 시달리고 쳐졌던 육신에 생기와 원기를 심어준다.

우리에게 희망찬 내일의 꿈을 샘솟게 하고 풍요로운 오늘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라는 멧세지를 담고 우리 자신의 심장으로부터 가을의 소리는 들리어난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작은 소리로 시작해서 종내에는 온 누리를 진동하는 약동의 소리로 퍼져나가는, ‘두근두근’ 거리는 실핏줄 소리가 바로 가장 흥겨운 가을의 소리이다.

시작은 혼자 하지만 듣다 보면 어느새 너나 할 것 없이 모두의 노래로 힘차게 울리게 되는 심장의 뜀박질 소리야 말로 정녕 만물이 익어가는 가을에 어울리는, 가을 스러운, 가을 다운 소리이다.

내 속에서 연주하는 가을의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확인하고 싶으면 가을이 무르익는 숲으로 나가보자.

산 오르막을 걸으며 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길가에 우거져있는 녹음의 합창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가을바람 신선하고 새들 지저귀는 오솔길이 손짓하며 부르는 은근한 소리에도 귀 기울여보자.

그렇게 그들의 소리를 다 듣고 있다 보면 그 후에는 어렵쟎게 내가 스스로 연주하는 붉은 빛 가을의 소리도 더불어 듣게 되리라.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타박타박 걸으며, 발바닥에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느끼면서 나무들의 숨소리에 호흡을 맞추다 보면 내 안에 있는, 내가 아닌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나는 가을의 세상과 하나가 된다.

이마에 서서히 땀이 맺힐 때 쯤 잠시 발걸음을 멈춰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바람이 전하는 호명(呼名)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가을의 숲길 한 가운데에 서 있으며 나의 오감(五感)은 이 숲과 함께 한다.

차츰 차츰 색이 들고, 못내 흥겨운 몸부림으로 잎이 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나는 심장으로, 실핏줄로, 가을의 소리를 내고 스스로 듣는 가을이 되어진다.

그렇게 가을이 되어지고 난 후에는 조용한 마음으로 가을의 기원을 올리자.

무엇보다 모든 것이 무르익는 이 가을에는 부디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해달라고 기원하자.

내 욕심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 없이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맑고 따뜻한 눈물을 배우게 해달라는 가을의 기원을.

그리고 이 가을에는 정녕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해달라고 기원하자.

집착과 구속이라는 돌덩이로 우리들 여린 가슴을 짓눌러 별처럼 많은 시간들을 힘들어 하며 고통과 번민 속에 지내지 않도록 빈 가슴을 소유하게 해달라는 가을의 기원을.

또한 이 가을에는 제발 풋풋한 그리움 하나 품게 해달라고 기원하자.

우리들 매 순간 살아감이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누군가의 어깨가 절실히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 따스함으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줄 수 있는 풋풋한 그리움 하나, 한껏 여물은 소망 하나, 그리고 물씬 무르익은 사연 하나 쯤 품게 해달라는 가을의 기원을.

그리고 또 이 가을에는 말 없는 사랑을 하게 해달라고 기원하자.

사랑이라는 말이 범람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간절한 사랑을 알아주고 보듬어주며, 부족함조차도 메꾸어줄 수 있는 겸손하고도 말없는 사랑을 하게 해달라는 가을의 기원을.

마지막으로 이 가을에는 정녕 넉넉하게 비워지고 따뜻해지는 작은 가슴 하나 가득 환한 미소로 이름없는 사랑이 되어서라도 세상의 모든 이웃들을 사랑하게 해달라는 절절한 가을의 기원을 두 손 모아 올려보자.

가을의 기원이 담긴 청아한 노래 소리가 풍요롭게 만들어지는 세상이라면 불행도 괴로움도 스며들지 못하리라.

행복하고 즐거운 웃음과 소망 춤추는 사랑의 기적만이 우리 모두에게 가을의 햇살 가득 담고, 가을의 기운을 가져다주는 전령사처럼 듬뿍 넘쳐나리라.

저작권자 © 서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