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갈대

 

가슴 깊이 자리한 갈대숲은

그 여름에도 끝없이 펼쳐져가고

농익어 황금빛 물결치는 갈대숲엔

한 줄기 바람 불어대다

 

쓰스스스스슷스-

마당을 쓰는 싸리비 소리 들려나

여름에도 가을 익는 듯 흔적 새기면

낭창낭창 휘어진 갈대 춤사위에

찰랑이며 지저귀던

이름 모를 새 울음 떨궈 지나치는데

 

바로 거기 깊은 가슴에

하나의 갈대가 서있었다

주위엔 비슷한 갈대가 어지러이

수십 수백 수천 수만....

 

헤아릴 수도 없고 다할 수도 없는

무한의 갈대숲 한가운데서

문득 외로움의 말 솟아나 바스락

제각각 무언가 속삭이기 시작하느니

 

한 걸음 더 다가서 무릎을 꿇고

귀 기울여 목소리에 가슴을 열다

나를 봐,

나를 봐,

 

갈대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저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다, 그런데

나를 보라고?

갈대를 보라고?

이 갈대도, 저 갈대도, 다?

 

아니지, 오직 하나의 갈대만

화르륵 불타오르고

그렇게 생각 무던히 흐르는 사이

가슴에서 흠씬 자라난 갈대숲

 

그 여름은 그래서 그만큼 쉬 깊어지다

 

시의 창

제목만 보자면 분명히 여름을 노래하는 시인데 내용은 정작 여름인지 가을인지 아삼삼하다. 허기사 여름이라고 해서 여름만 생각하라는 법이 있는가? 여름의 이야기 속에 가을을 묻히는 게 잘못된 건가? 여름이 가면 어차피 오게 될 계절 가을, 그 가을은 우리 마음에 이미 들어와 있는데, 여름 한 철 내내 더위와 피로에 젖은 속내를 살그머니 보듬으며, 다시 올 가을을 준비하라고 살그머니 속삭이고 있는데, 혹시 당신도 들리는가? 가을이 귓전에서 부르고 있는 소리를. 혹시 당신도 느끼는가? 가을이 슬쩍 다가서서 내미는 손의 감촉을. 바로 그거다. 그걸 느끼며 살아야 하는 거다.

언제이든 곁에 있는 것은 갈 터이고, 기다리는 것은 오는 거다. 그리 돌고 도는 것이 우리네 삶의 이름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 시작노트의 이름에, 가을의 이름을 간직한 여름의 이름을 올린다. 갈대라는 전령사를 앞세워서... 언젠가, 여름에 피어나 나름 우거진 갈대숲을 바라보며, 미처 적응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는 필자의 어리석은 삶이 투영되어, 미친 듯이 불쌍해진 마음으로 소리내어 통곡하다가, 그 울음을 기이하다는 듯 바라보는 뭇사람들의 시선에 계면쩍은 발걸음을 떼던 새벽 등산길이 못내 아쉬워, 하산하자마자 적은 시가 바로 이 시다.

과시 아직도 심장이 이렇게 쫄깃하게 뛰고 있다는 건 이미 아주 늦어버린 건 아니라는 반증인 바, 여름이라도 엄연히 갈대를 꽃피울 수 있는 가을 기운 존재커늘, 황혼녘 청춘 다시 불살라 착하고 어질게, 남은 여생 살아보리라는 작심과 다짐 얹어 하루의 일상 시작해본다. 오늘도 필자는 배우고 또 배우며 세상에 여름 갈대 한 자락 피워올리기 위한 실천 삼매경에 돌입한다. 아울러 이러한 필자의 노력에 동참을 권유하며, 만나지는 모든 이웃들에게 상큼한 향기를 한아름 씩 선사한다.

필자의 인사에 화답하는 그들에게는 깨끗한 축복 한아름 덤으로 얹는 걸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한 과정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말이 깨끗하면 삶도 깨끗해진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저마다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때 누가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에 관심을 두겠는가? 험담은 가장 파괴적인 습관이다. 험담에 관련한 어떤 욕구가 생겨나거든 얼른 입을 다물자. 인간과 동물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의사 소통 능력이다. 오직 인간만이 복잡한 사고와 섬세한 감정, 철학적인 개념을 주고 받을 수 있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우주의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우리가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고 한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고 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잃었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말자.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 얻었다고 너무 날뛰지 말자.

잃은 하나와 얻은 하나의 차이는 어떤 걸까? 잃은 것이 내게 득이 되는 것이라면 크면 클수록 좋을 것이고, 얻는 것이 내게 해로운 것이면 작으면 작을수록 좋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얄팍한 계산 속이다. 그런데 잃은 것이 크든 작든, 얻는 것이 크든 작든, 그 기준이라는 게 어떤 것일까? 따지고 보면 그것은 수십 년 살아오면서 습득된 자기 욕심의 기준일 것이다. 망자가 입는 수의에 호주머니가 없듯 태어나면서 갖고 온 내 손도 빈 손이었고,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갖고 갈 손도 빈 손이다. 빈 손에 잡히는 정도라야 제 손 크기 밖에 더 되겠는가?

그저 소박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자. 사랑만 하면서 살기에도 짧은 삶인데 그 삶 속에 왜 잡다하고 허접한 다른 것들을 채워놓으려고 드는가? 어리석고 우매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기만의 욕심에 집착하면서 만들어놓은 미움, 시기, 질투, 오해, 배신, 모략, 투쟁... 이런 것들을 다 버리도록 노력하자. 그리고 그렇게 비운 마음 속에 사랑, 화평, 행복, 양보, 이해, 배려, 동행... 이런 축복된 것들로 가득 채워보자. 그런 마음으로 하루날들을 살아가도록 하자.

그리고 새로움으로 다시 시작해 보자. 어떠한 경우라도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항상 열어두도록 하자. 마음의 밀물과 썰물이 느껴지지 않는가? 밀물의 때가 있으면 썰물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삶이란 어쩌면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행운과 고난의 연속 드라마인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금은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조금은 더 기쁘고 싶어서, 조금은 더 행운 쪽에 무게를 두고 싶어서 애를 쓰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아름다운 일상에 좋은 일들이 결과로 있어지기를 소망한다.

까닭 모르게 사람이 그리운 날은 물밀듯이 쓸쓸함이 밀려온다. 사람이 그리워 가슴 한 쪽이 서글프게 저려올 때마다 가까운 이들과 대충 어울려 감자탕에, 해물탕에, 중국요리에 음식 잔치를 벌려보기도 하지만, 쓸쓸하고 외로운 고독은 멈추지 않는 것 같다.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부딪치며 서로 사랑하고 이해해주며 그들을 만나는 것 또한 삶에 있어서 중요한 일상이지만, 사람을 쉽사리 믿어버리고 유난스레 정이 많은 필자에게 늘 들려오는 충고의 말, 말, 말들...

“넘 쉽게 정 주지 마세요.” “얇고 넓게 인간 관계를 형성하세요.” 그게 맘대로 될 것 같으면 애저녁에 그런 충고가 필요 없을 것이다. 동료들이 썰물처럼 나가고 난 뒤 시끌벅적한 잔치 끝의 고요는 늘 필자에게 더 무서운 침묵만을 안겨주지만, 그래도 숨 쉬고 살아있는 동안은 이 적막한 동굴같은 숲 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따라 부쩍 사람이 그립고, 살가운 정이 간절한 것을 보면, 이건 분명히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무리지어 있는 여름의 갈대를 본 탓일 거다. 갈대의 외로움을 함께 느꼈기 때문일 거다. 그렇지 않은가?

저작권자 © 서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