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

언제부터인가 말이 많아졌다고 한다. 과거에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이 많고, 두 번 세 번 생각 끝에 조심스럽게 겨우 한마디 정도 보탤듯 말듯 하더니 지금은 쉴 새 없이 말을 하고 싶어한다고 한다.

‘말이 곧 그 사람(言卽其人)’이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가슴에 품고 있었던 터라 처음엔 동의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난 행실을 찬찬히 되짚어보니 조금씩 말이 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 했다.

귀동냥으로 들은 바로는 말이 느는 것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정도 세상살이에 대해 안다 싶으니 인내심이 부족해지고 사사건건 간섭해 가르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에너지가 청소년기에는 왕성하게 활동할 ‘발’에 집중됐다가 노년기에는 ‘입’으로 옮겨지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라는 ‘힘의 쏠림’ 논리도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가장 가슴아픈 진단은 ‘기억력’에 관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는데, 과거 자신이 했던 말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했던 말을 또 번복하는 사례가 빈번해진다는 지적이다.

지금 하려는 말을 과거에 했는지 안했는지 헷갈리면 초기, 과거에 말을 했으면서도 한 적이 없는 줄 알면 중기, 할 말 못할 말 구분하지 못하고 함부로 내뱉으면 말기 증상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스스로를 돌아보면 머리끝이 쭈뼛 서는 진단법이다.

약 1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경남지방으로 출장을 갔다가 식당에서 우연히 한 후배를 만난 일이 있었다. 한 때는 절친했으나 서로 멀리 떨어지다보니 잊힐만하면 전화로 안부만 묻는 게 전부가 돼버린 사이였다.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안부와 근황을 묻고 답하던 중에 후배가 최근 직장을 옮겼다고 하더니 갑자기 ‘고맙다’는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니 후배는 과거 자신이 직장생활이 힘들어 전화를 걸었었는데 “너처럼 성실한 사람은 반드시 잘 된다”, “너는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후배와의 통화에서 그런 말을 한 듯도 싶었다. 워낙 말이 없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처리하는 성실함을 곁에서 지켜봤던 터라 안타까운 마음에 무슨 말이든 용기를 주고 싶었었다.

물론 그에게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그는 선배의 말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보다 능동적으로 새로운 직장도 알아보게 됐다고 했다.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되레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허리가 접힐 정도로 힘겨운 하루를 견뎌내는 이웃에게 주는 긍정의 말 한 마디가 듣는 사람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기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 화가는 생전에 만났을 때,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에게 꼭 지키려고 하는 약속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먼저 젊은 친구가 밥을 사면 맛있게 먹고 반드시 배로 갚되 티를 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분위기가 좋다고 끝까지 자리를 함께 하지 말고 적당한 때에 빠져주는 지혜도 필요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남의 말을 잘 듣되 가급적 내뱉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자리든 사람들이 모이면 말을 하고 싶고 참견하고 싶어지는데 돌이켜보면 물색없고 주책없는 잔소리에 그치기 십상이다. 또 참견지수가 높아지다 보면 주변 친구들은 결국 자신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고 자꾸 뒷걸음질을 치고 만다.

그는 특히 농으로 객쩍게 던진 말 한마디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에게 큰 아픔을 주는 경우도 있기에 갈수록 말을 무겁고 무섭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말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상대가 나로부터 존중받고 배려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신뢰가 쌓이고 그 역시 나에게 마음을 열고 귀하게 대하게 된다.

말은 입을 통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글이나 SNS 등을 통해서도 할 수 있으며, 파급력 또한 크고 빠르다. 특히 사회의 지도층이나 어른이라면 그 말이 갖는 의미는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보고 들었던 수많은 삶의 결락과 지혜가 말 한마디 속에 녹아있다고 믿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입을 주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위로받고 싶어하고 희망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해지려면 말에서부터 먼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되 스스로는 삼가고 아껴야겠다.

말은 한 번 내뱉으면 다시 주워담을 수 없기에, 입을 뗄 때는 겁나게 무겁거나, 혹은 무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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