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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박승봉 기자) ‘권력을 쥐어주면 그 사람의 본모습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과실이 더욱 눈에 띄는 이유이다. 그런데 반대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 더욱 가치 있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이도 있다. 회사와 근로자의 관계를 주도적 상생을 원칙으로 하여 사와 근로자가 다같히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결과의 메신저인 지재영 위원장

“노조위원장이 되며 시작한 나눔”

지난 해 11월1일 지재영(52) 씨는 6번째로 농심 노조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99년부터 이 자리에 처음 올랐을 때까지 꾸준히 해온 나눔도 햇수로 벌써 16년째다.

“처음 입사해서 엔지니어로 현장에서 근무할 때는 저도 봉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위원장이 되어서 저한테 많은 권한이 생기고 나니 이제 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라고요.”

처음 그는 어떻게 봉사를 시작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동사무소로 발길을 향했다. ‘봉사를 하려고 하는데 도와줄만한 곳을 알려 달라’고 하자 동사무소 직원들은 ‘양지의 집’을 추천했다. 당시 양지의 집은 시설 인가를 받지 못해 원장이 사비를 털어 1,2급 중증장애인을 돌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처음 양지의 집을 방문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혼자서 제대로 숟가락질을 할 수 없어서 입과 옷에 음식물을 모두 흘리면서 식사하는 사람들을 봤어요. 저는 평소 경증 장애인도 주변에서 보지 못했으니까 익숙지가 않아서 그 때는 사람들한테 쉽사리 다가갈 수 없었어요. 그런데 다음 달, 그 다음달 계속 찾아가면서 점점 보람이 더 커지더라고요.”

매달 그는 농심의 제품들을 차에 가득 싣고 양지의 집을 찾았다. ‘적게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십만 원씩을 원장의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이해가 가기도 해요. 그곳에서 당시 28살이었던 한 친구는 고등학교 때까지 비장애인으로 살다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하반신과 뇌 기능 일부를 잃어서 2급 장애 판정을 받았어요. 이 아이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건 사고 나기전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거였어요.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소풍갔던 일 하나하나 까지도 다 기억하더라고요. 그러니 얼마나 절망적이겠어요. 차라리 기억을 못하면 현실을 받아들일 텐데. 그 아이는 평생 살면서 한번이라도 자기 두 발로 서보고 싶은 게 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들불처럼 퍼져나간 봉사”

몇 년간 꾸준히 한 곳을 정해 봉사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본 이들은 그의 봉사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처음 그가 봉사를 할 때보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많은 인원들이 양지의 집을 찾는 날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대청소날이자 묵힌 빨래까지 모두 하는 날이 되었다.

“불교에서 ‘복을 짓는다’는 표현을 해요. 복은 빌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우리 농심 안양공장 식구들이 함께 다 같이 복을 짓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누군가를 위해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찬지 몰라요. 그러니 봉사가 들불처럼 번지더라고요."

7년 동안 안양공장에서 도움을 주는 동안 양지의 집은 드디어 정부의 허가를 받고, 현재는 군포에 3층 건물을 마련했다. 시에서 보조금이 나오고, 교사 한 명당 장애인 세 네명을 돌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그러자 그는 양지의 집보다 더 어려운 시설을 돕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은 ‘에덴의 집’, 이제는 ‘꿈담’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그 동안 봉사가 유행처럼 번진 안양 공장에는 ‘사랑나눔회’가 생겼고, 조합원들은 자신의 월급에서 천원, 오천 원부터 만원 이만 원까지 나눠 기금을 마련했다. 현재 사랑나눔회에 속한 인원만 해도 200명. 이제 모든 조합원들은 나눔에 익숙해진지 오래다. 매달 소년소녀가장과 불우이웃을 위해 한 가정 당 30만 원의 현금과 쌀, 라면을 전달하고, 각종 치료비를 지원한다. ‘또한 <<22째 남다르게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민간단체인 <사랑과 봉사회>’상임고문으로 매달 십 만원의 현금 및 농심제품 과자와 라면 30박스를 지원하여 “사랑과 봉사회”에서 매달 실시하는 식료품 나눔 행사에 저소득층과 불우노인 들에게 도움을 주고있다. >>

이 외에도 그는 개인적으로 아프리카에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 3명을 돕고 있다. 그의 도움으로 삶의 고난을 견뎌낼 수 있는 이들과 봉사의 기쁨을 알게 된 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깨끗한 거울이 되기 위한 봉사”

지금부터 13년 전 지 씨는 아들에게 급식비를 못 낸 아이들에 대해 들었다. 같은 반 친구들 중에 1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밥을 못 먹고, 점심 때가 되면 교실 밖으로 나간다는 이야기였다.

배우자와 상의한 그는 아들을 포함해서 4명의 아이들의 급식비를 매달 자동 이체했다. 자동이체는 아들의 중학교 졸업까지 이어졌다.

“어른이 솔선수범해야 해요. 우리가 거울이잖아요. 그런데 매일 자신을 위한 사치와 투자만 하는 어른들을 보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어요. 쓸 거 다 쓰고 남는 걸로 남을 돕는다는 마음을 가지면 절대로 도울 수 없어요. 남을 수가 없으니까요. 내가 실천하면 자식은 저절로 따라서 해요. 길을 가다가 추운 겨울 날 할머니가 구걸을 하는 모습을 보면 자기 주머니에 있는 5천원 중 천원만이라도 할머니를 위해 드릴 수 있는 자식이 될 거에요.”

봉사하는 이들의 마음은 모두 똑같은지 사랑나눔회 봉사에서도 조합원들은 자신의 자녀를 모두 데려와 봉사를 하곤 한다. 처음에 봉사활동을 하면 아이들은 장애인들한테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하지만 점차 봉사에 익숙해지고, 봉사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받아들인다.

“봉사를 어렸을 때부터 접하게 하면 앞으로 세상은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밥 먹고 나면 양치하듯이 습관처럼 봉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유가 없더라도 없는 가운데서 나누는 자세를 갖게 되길 바라고요.”

16년 전 모두 과격한 노사운동과 적대적 노사관계를 지향할 때 홀로 상생을 주장했던 그는 상생과 봉사 모두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해야 된다고 말한다.

“차가운 이성이 필요할 때도 물론 있지만 따뜻한 감성이 기본이에요. 머리로 하는 건 감동이 안 생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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