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향기고운 아내

 

별빛 머금은 동쪽 바람

자작나무숲 걸어 나와

새벽 여명 챠임벨로

선잠 깨운 햇살 사이

열린 문 들어오려

서걱대며 섶 스치더니

 

라일락 향 폴 폴 시나브로

샤론의 꽃방석

비늘 구름 걷어내곤

찬연히 뜨거운 기운

지구 온통 들어올렸다

 

마음밭에 붙들어 맨 기도 제목,

천사의 몸짓 사칭하는

라일락 향으로

하얀 옷 입은 내 여인이여!

 

하마 멀리로 변색되어진 시절들

세월인 양 먹으며

계절 바뀌는 소리

들리어날 적 마다

선혈빛 눈물로 기원한

마즈막 세마디,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

시의 창

옛날의 가부장적인 전통문화 시대를 지나서 여성평등이나 성차별 등의 용어가 현실적으로 보편화된 요즈음이지만, 아직도 일각에서는 여성 스스로가 진정한 평등이나 자유와는 조금 동떨어진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 접하면서 간혹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지위나 권리에 대하여 확고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열정적으로 부르짖는 소위 여류명사들조차도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는 듯 하다.

보통은 남성이 청혼을 하면, 결혼 후에 얼마나 행복하게 해줄 거냐고 여성이 물어본다.

물론 대부분의 남성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줄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대하면, 누구나 행복한 한 쌍이라고 부러워 한다.

그런데 반대로 남성이 여성에게 얼마나 행복하게 해줄 거냐고 물어보면, 질문을 받은 여성은 어떤 대답을 할까?

우습게도 여성이 남성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편으로 만들어줄 거라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건 정말 어색한 표현으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여성은 다소 주제 넘는다고 여기는 것이 대다수의 사고이다.

그런데 이런 의식이 바로 성차별이라는 건 잘 모르나보다.

모름지기 가정이란, 부부란, 어느 한 쪽에서 다른 쪽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그런 일방통행식의 관계가 의무로 설정되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참된 부부의 도리이다.

한 가정이 새로 만들어지고, 부부가 만나서 함께 하는 생활을 시작하다보면 매사에 부딪치고 시끄러운 소리 날 일이 허다하다.

왜 아니겠는가?

그동안 오랜 세월을 살면서, 모든 삶의 이야기를 따로 떨어져서 자유롭게 써왔는데, 어느 순간 결혼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복잡하고 난해한 이야기를 같이 쓰기 시작하였으니, 어색하고 엇박자가 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는 뻔한 일이다.

그러니 때로는 심하게 다투기도 하고, 심지어는 견디지 못하여 이혼을 결심하는 부부들도 더러는 있는 것이, 특히 요즈음 들어서 더 심심찮게 보여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부부라는 관계가, 또는 가정이라는 실체가,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쉽사리 만났다 흩어져도 되는 가벼운 인연의 산물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부부들과 상담을 하다보면, 부부의 성격과 생활방식이 너무 달라서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러나 생판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부부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서로 장점과 단점이 다르면, 오히려 각자의 장점으로 상대의 약점을 보완해줄 수 있다.

부부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해주어야 하는 관계이다.

떨어져있을 때 보다 둘이 함께 있을 때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조물주는 당초에 우리 각자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래서 개성도 기질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마다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므로, 가끔 서로의 방향이 어긋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이 나와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 곧바로 공격자세로 나오거나, 충돌하고 결별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간혹 보게 된다.

탈무드에서는 ‘부부의 도’를 이렇게 가르친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고....”

이 말은 상대가 내 말을 따라와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얻으려면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아내가 내 뜻대로만 하면 우리 가정은 바로 화목해질텐데.”

“내 남편이 자기 정돈만 잘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내 손윗사람이 나를 제대로 대우하면 나도 무례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야.”

이런 태도는 결코 옳은 태도가 아니다.

평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내가 상대방에게 맞추어야 한다.

때로는 자존심을 접어야 한다.

우리가 갈등의 불씨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이에 상대는 어느새 바뀌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바꿀 수 있다.

상대에게 모든 공을 돌리고 치하하며 고마워하면, 상대는 반드시 우리를 다시금 높여준다.

그렇게 자비롭고 친절한 씨앗을 뿌리면, 서로의 관계가 쑥쑥 자라나기 시작한다.

진실로 건강한 관계를 원한다면 갈등이 파고 들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 틈을 사랑과 믿음으로 먼저 채워야 할 것이다.

부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 거창한 계획이나 이벤트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해놓고, 열심히 노력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다.

먼 미래에 이루어질지 아닐지도 모르는 막연한 사실을 꿈꾸기를 강요해서도 안 된다.

아무리 좋은 계획일지라도 실천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공상일 뿐이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는 그 계획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노력에 비해 얻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인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

고양이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못한 한 무리의 쥐들이 전체회의를 열고 널리 의견을 모았다.

쥐들은 고양이에 대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의견을 논의했다.

모두들 이번 회의가 마지막이 되기를 기원하며 머리를 쥐어짰다.

고양이에게 물고기나 닭을 잡아먹는 습관을 기르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고양이 독약개발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던 중 모든 쥐들은, 꾀 많은 늙은 쥐가 내놓은 마지막 의견을 듣고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늙은 쥐가 제시한 의견은, 고양이목에 방울을 달아 고양이가 움직일 때 마다 종소리가 울리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종이 울리면 그 소리를 듣고 미리미리 대비하여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고양이목에 방울을 달 용감한 쥐가 나타나지 않았다.

수많은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그 어떤 쥐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늘 이상과 계획이 존재한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 이상을 실현하고, 모든 계획을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상을 꿈꾸기만 할 뿐 실현하지 못한다.

계획은 거창하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상과 계획은 점차 희미해지고 만다.

비록 작은 계획일지라도 최선을 다해 실행에 옮기다보면, 우리의 인격이나 실력을 한 층 더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계획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계획이란 실행에 옮겼을 때라야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일생동안 우리에게 다가온 기회는 수없이 많을 수 있다.

지금도 우리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그 기회는 지나가고 만다.

부부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주춤거리고 있는 사이에 관계는 악화되고,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질 것이며, 순식간에 루비콘강을 건너, 돌아오지 못할 사이로 변해버릴 수 있는 것이 부부 관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이미 상대편에게 흥미가 없어졌음을 호소하고, 권태기가 왔음을 비통해 하고 있다.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한다.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는, 아내에게 있어서 남편은 일생 죽을 때까지도 알 수 없는 타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얼마 되지도 않는 사이에 모든 것을 알았다는 부부는 중대한 착각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무진장 매장량이 들어있는 풍부한 광산이기 때문에, 잠깐 사이에 폐광이라고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

같은 물건이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다.

남편은, 아내를 평면도로만 보고 다 보았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삶의 지혜와 행복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발견해 낼 줄 아는 눈에 달려있다.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일수록 소중하게 아끼고 행복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똑같은 사람, 또 똑같은 사물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귀한 존재가 될 수도,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소중하고 귀히 여겼던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필요로 하건, 하지 않건, 가까운 곳에 오래 존재하다 보면 그 존재 자체의 감사함에 무감각 해지는 것 같다.

실은 존재함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축복임을 잊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혹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축복은 없을까?

한 때는 퍽이나 소중하며 곱다고 생각했던 인연을, 당연히 곁에 있음만으로 홀대를 한 적은 없을까?

가까운 사람과의 돈독한 사랑, 귀한 사람과의 소중한 시간, 그 인연과 행복의 조건들을 더 많이 가꾸고 키우고 모으는 오늘 하루가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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