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서는 나날들아

 

빼어난 솜씨로 꽃꽂이한 욕망 오름세

보일듯 보일듯

넘쳐나는 희망이 방 가득 채우다

 

나눔의 미덕 자리한 따사론 구들목,

그 깊은 방 깊은 곳엔

수다만 떨던 절망 끝나고 지금은

남실 피어오르는 희망밖엔 달리 없어

 

까탈스런 안목 집적거리는

고뇌의 선물 다 받아들고

투명하게 반사되는 구수한 입담

보료로 깔리우니

 

그렇지!

아껴야 하는 건 마음이 아냐,

속감춘 미움이지

 

이제까진 비록

구김진 가슴팍 흐려진 얼굴로

숨 겨우 붙어 살았으나

잔뜩 피 튀기던 우리의 화려한 재기

아낌없는 마음으로 아궁이 지피다

 

시의 창

‘짐 스토벌’의 ‘오늘이 그날이다’에는 ‘베스트(B.E.S.T.)가 되라’는 제언이 실려있다.

자신의 하는 일에서 최고(最古), 즉 베스트(Best)가 된 사람은 주위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살게 된다.

자신의 일에서 베스트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베스트가 구성하는 각 요소들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베스트의 첫 번째 B는 ‘균형[Balance]’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직업적인 부분에서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인생을 구성하는 다양한 분야에서 균형 잡힌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면 결코 그의 인생은 성공적이라 할 수 없다.

베스트의 두 번째 E는 ‘열정[Enthusiasm]’이다.

열정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엉덩이를 맞으며 처음으로 세상 공기를 들이마신 순간부터 우리 눈 앞에서 관 뚜껑이 덮이는 순간까지, 인생의 매 순간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인생 목표나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조금도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당신에게는 분명 변화가 필요한 것이며, 당장 당신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베스트의 세 번째로 S는 ‘집중력[Single-mindedness]’을 뜻한다.

이것은 매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일을 할 때는 일에 집중하고, 놀 때는 노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즉, 어떤 일을 하든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선택한 그 일 하나에만 오직 온 관심과 애정을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T는 ‘끈기[Tenacity]’이다.

어떤 일이든 끈기를 가지고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공에 이른다.

끈기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 ‘윈스턴 처칠’은 역사에 길이 기억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지금 바로 베스트의 의미를 다시 새기면서 베스트가 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보자.

베스트는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와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결국은 베스트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머니가 딸에게 저녁식사에 사용할 감자를 가져다 달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그러자 어린 딸은 그 중에서 제일 작은 감자를 골라서 가져왔다.

“얘야, 왜 작은 것만 가져 왔니 ?”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제일 작은 것을 먼저 다 먹으려구요. 그래야 나중엔 제일 크고 좋은 감자를 먹을 게 아니겠어요 ?”

어머니는 작은 감자를 다시 창고에 쏟으면서 말해주었다.

“그러면 우린 매일 작은 감자만 먹게 되는 것을 모르니 ? 오늘 먹을 감자는 제일 좋은 것을 고르렴. 그럼 매일 제일 큰 감자만 먹게 될 것이란다.”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우리가 흔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중에 뭔가 큰 것을 주어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사랑법이다.

서로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나중에까지 남겨 두는 것은

결국 제일 작은 것을 지금 주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어쩌면 미래에 최선의 것을 줄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최선의 것을, 항상 최선의 것을 골라 서로에게 주려고 한다면, 우리는 매일 최선의 것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은 지금 바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당신이 얻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만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것을 얻을 수 있고, 삶의 보람이 또한 거기에 있다.

하지만 얻기만 할 것이 아니라 항상 버릴 준비도 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잃을 때 그 상처로 인해 미래나 현재의 삶이 담보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옳은 일이건 그른 일이건, 우리가 선택하고 행하는 일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댓가가 따르는 법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슨 일이건 얻어지는 만큼 잃어지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것은 어쩌면 삶의 법칙과도 같다.

어떤 것을 얻고자 할 때, 그것을 취하기 이전에 얻고자 하는 것으로 하여 잃어지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일까를 가늠하여 볼 것이요, 그리고 난 연후에 얻고자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면 내가 얻은 것의 결과가 크든 작든, 성취된 것에 대해 만족감이 배가할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삶은 ‘정의로운 삶’을 뜻하기도 한다.

이른바 정의는 사랑과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책임이 빠진 정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의는 무엇일까 ?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정정당당하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행위가 정의로운 행동이다.

정의의 가치척도는 자신이 스스로 재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면서 대중에게 해를 끼치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한다면, 결코 그를 정의롭다고 지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계에서는 이 정의라고 하는 표현이 경우에 따라 참 유효적절하고 편리하게 아전인수 격으로 이용되고 있다.

다른 여건이나 환경은 아예 고려할 필요조차 없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무조건 정의의 발상이며, 내가 선택한 정책과 제도만이 다른 사람들의 결정 위에 군림하는 정의로운 왕도라고 생각하는, 편협하고 그릇된 아집에 사로잡힌 한심한 정치가들이 무분별하게 요즘의 정치판을 뒤흔들고 있다.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상대방의 의견이라면 가치나 진위를 따지기 이전에 무작정 매도부터 하고 질타를 하면서 목소리를 높여야만, 무슨 민주적 투사라도 되는 양 앞뒤 안 재는 폼새가 정녕 볼썽사납다.

그렇게 국민을 볼모로 잡아 소수의 선택된 자들의 권익만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툭하면 국민의 대변자요, 국민을 위한 정당이라고 입에 발른 거짓말을 일삼고 있으니 이러다가 우리나라의 정치가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사자들은 반성은 커녕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들은 완벽하니까 상대의 잘못만 찾아내면 된다고 혈안이 되어 있으며, 진정한 국민의 행복과 민생을 위한 정책 대결은 뒷전인지라 차라리 서글프기까지 하다.

책임도 사랑도 완전 실종된 정치판에 어찌 정의가 있겠느냐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근본적인 천성이 백의민족인지라 세상 어느 나라의 국민들보다 그래도 조금은 더 착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간혹 미국의 정치에 관한 보도를 접하다보면 신기하기까지 한 모습이 종종 눈에 띤다.

대통령의 국회연설이 있게 되면 시종일관 여야를 막론하고 경청하며, 중간에 일제히 기립을 해서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낸다.

대결을 할 땐 하더라도, 한 나라의 대표인 대통령의 연설은 국민된 도리로 들으면서, 수긍할 것은 수긍하는 성숙한 정치인들의 태도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곤 한다.

역시 선진국은 저런 거였구나, 그래서 저 나라가 잘 사는 거구나, 하는 생각에 한 옆으로 자존심도 상하고 슬며시 부러움이 샘솟는다.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작은 시빗거리라도 찾아내어 트집을 잡는 것만이 참된 민주주의인 줄로 착각하는, 그리고 그렇게 하는 길이 자신의 지역구 주민들에게 표를 받아내는 치적인 줄로 오판하는 유치한 정치인들이 하루 빨리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름 뿐인 국민의 대변자가 아니라, 환골탈태하여 명실상부한 국민의 심부름꾼으로 거듭나는 정치인들이 속속 생겨나고, 진정한 정의가 뿌리 깊은 나무처럼 든든하게 자리매김되는 우리의 아름다운 정치가 새롭게 다시 일어서기를 기대해본다.

중학생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열심히 사는 어머니가 있었다.

힘든 행상 일을 하면서도 밤늦도록 도서관에 있다는 아들의 말 한 마디에 힘이 불끈 솟아 영 피곤한 줄도 모르는 어머니였다.

남들처럼 풍요롭고 넉넉하게 뒷바라지도 못하는데 아들은 삐뚤어지지 않고 오늘도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있다고 하니 아마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언제나 철썩같이 믿으면서 오직 아들 하나만을 의지하고 살던 어머니에게 어느 날 이웃사람이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귀띔해주었다.

아들이 저녁마다 PC방에서 산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울며불며 아들에게 늘 도서관에 간다는 거짓말을 했던 이유를 추궁했다.

그러나 아들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엄마, 저는 거짓말 하지 않았어요. 저녁마다 도서관에 간다고 했잖아요?

보세요. 저 PC방 이름이 바로 도서관이라구요.”

우리는 지금 겉과 속이 다른, 진짜와 가짜가 뒤바뀐, 유명무실한 정의의 세상에서 혼란을 온 몸으로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발자국을 되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뒤엉켜서 정신없이 혼돈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무수한 발자국 속에 더러는 흔들리는 발자국도 섞여 보인다.

흔들리는 발자국일지라도 발자국은 남겨지게 되어 있다.

올곧은 것이든, 삐둘삐뚤한 것이든, 전자든 후자든, 발자국은 발자국이다.

물론 누가 잘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세상 아닌가?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밝은 생각 심으며 살아가다 보면, 진정으로 바라던 그 모습까지는 아닐지라도, 활짝 미소지으며 웃을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다.

모두 모두에게 희망 가득한 최상의 날들이, 서로의 마음밭에 햇살 가득하게 비추어 힘차게 다시 일어서는 나날들이, 최선을 다해 정의롭자고 베스트를 다짐하는 우리들에게 경자년의 새 해처럼 활짝 열려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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