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가을

 

가을밤 귀뚜리

끙끙대는 녀석 바라보다가 문득

열리어진 하늘, 들판,

 

가을 고향…

 

돌담밑 때깔좋은 떡호박 누렇게 익어가고

발자국 소리에도 화들쿵짝 놀란 메뚜기

쫓기는 날개사이 햇볕 엉기어들면,

 

한 여름내 대롱대롱 매달린 단감나무 가지에서

가을! 소리 숨가쁘게 달려오더니

 

이른 봄부터 텃밭 놀릴 순 없지,

늙으신 어머니 은근한 정성으로

새빨가니 익어 마디줄기 부러질 양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밭 시렁에서

햅쌀처럼 새하얀 웃음 머금고

수건모자 쓴 맞동서는

가을을 한 소쿠리 따고 섰었드랬지

 

이제는 텅 비었을

어릴 적 그 고향집 잠자리 찾아들고

밥 짓는 이웃 굴뚝연기 뜰안 솔 솔 감아돌텐데,

 

뒤개울 맑은 물소리 한 입 가득 품어내며

아련한 기억속

고즈녁한 가을 가운데로 돌아가고파

 

시의 창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혹은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을 우리는 ‘고향(故鄕)’이라고 부른다.

그렇건만 고향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다정함과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라는 정감을 강하게 주는 말이면서도, 정작 ‘이것이 고향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운 단어이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는 곳이며, 깊게 정이 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로 내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이다.

고향은 공간이며, 시간이며, 마음[人間]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이다.

공간, 시간, 마음 중에서는 비중이나 우열을 논할 수가 없다.

살았던 장소와, 오래 살았다는 긴 시간과, 잊혀지지 않는 정을 분리시킬 수가 없음이다.

따라서 고향은, 구체적으로 객관적으로 어느 고을이나 어떤 지점을 제시할 수도 있고, 언제부터 어느 때까지 살았다는 시간을 제시할 수도 있으면서,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각인각색으로 모습을 달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움, 잊을 수 없음, 타향에서 곧장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이라는 면은 공통이다.

일단 사람은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것은 생물학적인 탄생이며, 고향이라는 장소에서 태어난 것은 지리학적인 탄생이다.

이러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시름을 가리켜 향수라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아련한 추억은 누구에게나 가슴 한 구석에, 아름답고 행복하면서도 아릿한 울림으로 자리하고 있는데, 특히 사 계절 중에서도 가을이면 유독 그 그리움의 정도가 더해진다.

아마도 조금은 쓸쓸하고 서늘한 바람과 더불어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들판의 정경들에서 그런 향수의 내음이 더 솟아오르게 되는가 보다.

그러면서도 고향은 생각만으로도 왠지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그윽한 안식을 갖고도 있다.

그래서 외로울 때나 고독할 때 위로가 되고, 살기 힘들고 버거울 때도 근원적인 힘이 솟게 해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고향은 우리의 마음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마음의 터전이다.

일전에 필자는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업무차 상경을 한 적이 있다.

기왕이면 고속도로 보다는 옛길의 추억이 이끄는 유혹과 아울러 가을 풍류의 심상에도 한 번 쯤 젖어들고파서, 시골의 풍경이 정겨운 지방도를 선택하였다.

유유자적하는 기분에 흥얼거리며 차를 몰다보니, 문득 전에 자주 다니던 용문 방향으로 경유하게 되었다.

생각난 길에 가을 단풍이 흐드러진 용문산에 들러서 주차를 하였다.

한 나절을 혼자 거닐면서 가을과 고향의 맛에 흠뻑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보니, 그야말로 신선놀음의 일탈이었던 듯 하다.

일탈의 끝자락에서 만난, 황금가사를 차려입은 천년보살 용문사 은행나무는 나이를 엄청나게 많이 먹었지만 여전히 혈기왕성하고 정정하였다.

인근 해우소의 거름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루 땅 밑에서 80드럼의 수분을 뿌리로 빨아들인다고 하는데, 황룡이 꿈틀꿈틀 요동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듯, “크르르! 크르르!” 포효소리가 온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았다.

그냥 장엄하고 웅장할 뿐이었다.

그렇게 천년 넘게 요지부동 가부좌를 틀고 지금도 묵언수행 중이다.

그렇다.

용문산 은행나무는 미륵보살이다.

바로 살아있는 나무보살이다.

나이는 이미 잊은지 오래, 1100세인가? 1500세인가?

저잣거리 중생들은 은행나무 법랍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이 잦다.

들어보니 요즘은 평일에도 5000여 명, 휴일엔 1만5000여 명의 중생이 은행나무 보살을 ‘뵈러’ 온다고 한다.

누구는 신라 ‘경순왕’의 세자 ‘마의태자’가 금강산 가던 길에 심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은 것이 뿌리가 내렸다고도 한다.

기껏 100년도 살까 말까 한 인간들의 마음이 이런 전설을 자아냈으리라.

아마도 신령스러운 나무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일 것이다.

‘고종 황제’가 승하했을 때 큰 가지가 부러졌다거나,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도끼날을 들이댔을 때 느닷없이 마른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도끼 자국은 지금도 선연히 남아 있다.

아무튼 그 은행나무는 봄이 오면 여린 연두잎을 말없이 틔워내고, 가을엔 샛노란 은행잎을 온몸에 그렁그렁 매단다.

그리고 바람 불고 서리 내리면 우수수 한 순간에 털어버린다.

아마도 그건 침묵의 소리일 게다.

온 몸으로 토해내는 천둥소리며, 몸짓으로 보여주는 염화시중의 미소다.

황금 옷의 나무성자 용문산 은행나무는 그 어떤 젊은 나무보다도 튼튼하다.

그래서 단풍도 가장 늦게 든다고 한다.

매년 10월 하순이 되어야 어김없이 샛노랗게 물들었었는데, 유독 올해는 예년보다 조금은 일찍 가을 단장의 전갈을 보내왔다고 한다.

허기사 그러다가 무서리라도 내리면 하루 이틀 만에 모조리 져버릴테지.

속세의 옷을 떨쳐버리듯 “우수수!” 노란 은행잎 비를 내리며 훌쩍 옷을 벗어버릴테지.

그렇게 저물어가는 가을의 뒤안길에서 용문산 은행나무는 우리에게, 깊은 마음과 넉넉한 품위로 푸근한 고향의 추억 한 페이지를 또 장만해줄테지.

이 가을에 일탈삼아 찾은 용문에서 감칠 맛 나는 고향의 멋을 한 아름 담을 수 있어서 정말 좋은 날이었다.

살다보면 그런 날이 있다.

점심은 먹었냐는 전화 한 통에 마음이 위로가 되는 그런 소박한 날이 있다.

일에 치여 아침부터 머리가 복잡해져 있을 때 뜬금없는 전화 한 통이 뜀박질하는 심장을 잠시 쉬어가게 하는 그런 날이 있다.

별 것 아닌 일인데, 살다보면 그렇게 전화 한 통 받기가 사실은 어려울 수가 있는 게 요즘 세상이라, 이런 날은 빡빡하게 살던 자신을 한 번 쯤 쉬어가게 만든다.

전화해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 그 따스함을 잊지 않으려고 닫힌 마음 잠시 열어, 짐짓 그에게 제안을 한다.

“언제 차 한 잔 하시겠어요?”

살다보면 그런 날이 있다.

내 입에서 먼저 차 한 잔 하자는 소리가 나오는 그런 별스런 날도 있다.

실은 따스한 마음마저 거부할 이유가 없기에, 아낌없이 그 마음 받아들여 차 한 잔의 한가로움에 취하는, 살다보면 그런 날도 있는 것이다.

오고 가는 마음의 교류는, 고운 미소와 아름다운 말 한 마디로 전달하여 만들어낼 수 있는 마음의 선물이다.

사람의 미소 안에 담긴 마음은 배려와 사랑이다.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는 스스로를 아름답게 하며,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

댓가 없이 짓는 미소는 자신의 영혼을 향기롭게 하고, 타인의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또한 자신을 표현하는 말은 스스로 지니고 있는 내면의 향기이다.

칭찬과 용기를 주는 말 한 마디에 어떤 이의 인생은 빛나는 햇살이 된다.

아름다운 말 한 마디는 우리의 사소한 일상을 윤택하게 하고,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준다.

실의에 빠진 이에게 격려의 말 한 마디, 슬픔에 잠긴 이에게 용기의 말 한 마디, 아픈 이에 게 사랑의 말 한 마디, 그걸 건네보자.

자신이 오히려 행복해질 거다.

화사한 햇살같은 고운 미소와 진심 어린 아름다운 말 한 마디는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하는 보석이다.

계속되는 아름다운 날들 속에 영원히 미소 짓는 우리들 세상이고 싶다.

더불어 사는 인생길에 언제나 힘이 되는 말 한 마디를 아낌없이 건네주는 우리들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욱 크고 깊은 사랑의 표현으로 마음을 전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은 우리들 세상이었으면 더욱 좋겠다.

어쩌면 가장 깊은 사랑과 관심은 말이 아닌 포옹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허그 테라피(Hug Theraphy)’란, 그저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만으로 아픈 곳을 치료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저 따뜻한 포옹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히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에, 아픈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환자들이 아픈 곳은 몸이지만, 치료의 근원지는 마음에 있다고 한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마음의 의사가 될 수 있다.

아픈 사람에게 다가가 따뜻한 눈빛과 체온을 나누어보자.

그리고 느껴보자.

그의 심장이 우리의 심장에서 함께 뛰고 있음을.

작고 여린 새처럼 우리의 품 안에 안긴 그의 숨결을.

무슨 위로의 말을 해주느냐는 그리 중요치 않다.

그저 따뜻하게 꼭 끌어안아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느껴보자.

내가 안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긴 것처럼 더없이 평안하고 따뜻함을.

사랑과 관심은 부메랑과 같아서 베풀면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것을.

우리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그 근사한 이유를.

풍요로운 고향의 숨결을, 알싸한 가을의 향기를, 그리고 그 속에서 더욱 사람답게, 사람스럽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꿈과 따뜻한 염원을.

그렇게 깊게 깊게 숨 들이키면서 한껏 마음을 열자.

우리 마음의 고향은 예 있고, 우리 사는 시절은 지금 흐드러진 가을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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