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시
가을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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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0.0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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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삼의 초대시]

가을과 시

 

새물내 물씬 나는 쪽빛 하늘

고추잠자리 이리저리 눈알 굴리고

먼 산 성큼 눈앞 다가오니

산자락 감국 노오랗게 피누나

 

말랑말랑 살갗 간질이는

고슬고슬 햇살바람에

차르르 허투루 부서지는

발밑 이슬방울들

 

등성이 가부좌 튼 마른 풀냄새

코 부비며 맡다보니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예감 닮은 심사

 

춤사위같은 시심속

나 시가 되고

시는 내가 되고,

 

나와 시 사이에 벽 없으며

시가 흐르는 길 속엔

내가 있으니

 

허랑한 심사 도긴개긴

찌르르 ~~

풀벌레소리 길섶 울린다

 

[시의 창]

목하 가을이다.

온 산이 붉은 홍엽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가을의 한 가운데에 와 있음이다.

이제 머쟎아 낙엽이 지고 그 위로 바람 덮이면 세월은 또 그렇게 계절을 데리고 갈 것이다.

겨울이라는 시린 이름을 우리에게 대신 건네주면서.

아무튼 지금은 흔전만전 누리에 지천으로 들어차 있는 이 가을은 이름하여 푸르른 천고마비의 계절이면서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이다.

그리고 또 가을은 밀쳐놓았던 머리맡의 책을 끌어당기는 독서의 계절이다.

그렇기에 가을은 낭만과 감성의 계절이며 아울러 사랑과 풍요의 계절이라 했던가 ?

유난히 가을을 많이 타는 남자들만 그런 기분에 사로잡히는 건 아닐테고 추측컨대 가을에는 누구나가 시인이 되어진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소슬바람 부는 가을이 오면 웬지 모르게 쓸쓸한 가을의 시 한 편 쯤 입속으로 읊조리며 외투깃 올리고 호젓한 길을 걸어보고픈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구태여 시 낭송은 못되더라도 고독을 씹으며 구성진 가을 노래 한 소절 못 부를 이유가 없고 여기에는 남녀노소 가릴 까닭이 없다.

이렇게 가을은 우리에게 로맨틱한 시인이 한 번 되어보라고 유혹한다.

그런데 멋드러진 시를 쓰고 싶은 충동과 심사야 가히 하늘에라도 닿겠지만 도무지 시를 쓴다는 일이 말처럼 그리 녹녹하지를 않은 것이 문제다.

머리 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춤을 추는데 그걸 무슨 말로 어떻게 적절하게 표현해야 시가 되는 건지 그냥 막연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허기사 아무나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술술 시를 써댄다면 정작 전문적으로 시를 쓰면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시인들이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시를 쓰는 요령이나 방법 등에 관한 강의나 전문 서적도 필요 없을테고, 시인이 힘겹게 시를 발표해도 이미 신선함이 배제되어버렸으니 결국은 흥미를 잃어서 거들떠보는 독자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은 필자같은 부류의 업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영 재미없는 사단이 벌어진 결과가 되는 셈이다.

그래도 짧디 짧은 금년 가을만큼은 그냥 맥없이 떠나보내자니 정작 가을 보기 민망하고 체면이 안설 듯 하여 급하게라도 작심하고 시 한 편 써볼까 하는 용기를 내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오늘은 모처럼 시를 짓는 요령에 대해 풀어보기로 한다.

우선적으로 단언컨대 시라고 하는 가치는 창작능력을 지닌 전문 시인과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의 전유물 만은 절대 아니다.

우리 선조들이 일찍부터 시 읽기와 쓰기를 교양으로 해 왔듯이 현대의 시 읽기와 쓰기도 누구나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교양으로 가능해야 한다.

오래 전 공자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를 대하여야 하고, 무엇을 알거나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낫다” 고 하였다.

모든 예술은 양생을 위한 것이므로, 시인의 길이 형극의 길이며 시 공부가 고통스럽다는 등 엄살이나 허풍 등의 겉멋을 부리지는 말고 지극히 자연스럽고 즐거운 마음으로 접근하는 기본 자세가 필요하다.

시는 역사적으로 인류가 남겨왔고 앞으로도 남겨야 할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그러므로 감성의 보물창고인 이 시를 그냥 알거나 좋아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먼저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즐기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책상에서의 습작 작업만 고집하지 말고 침상이나 식탁, 공장 쉼터, 거리, 여행지 등 생활과 여가 공간에서 틈틈이 자신의 속 마음을 펼쳐보며 공감과 조화의 힘을 키우고 상상력을 단련해나가면 된다.

좋은 시를 쓰는 일에는 먼저 남의 시를 많이 읽는 훈련이 선행적으로 필요하다.

남의 시를 많이 읽으면서 기존의 좋은 시를 통해 감동을 많이 받아야 한다.

이런 훈련 없이는 결코 좋은 시를 쓸 수는 없다.

감동을 주는 시들은 대부분 어려운 고통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즉흥적으로 쉽게 쓰여진 것이 많고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의 이해도 아주 쉬워진다.

시는 마치 음악처럼 일정한 리듬, 즉 운율을 가지고 함축성 있게 짧게 말해야 하는 것이니만큼 길고 장황하게 말하면서도 이해는 되지 않고 감동을 주지 못하는 시라면 이미 시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새삼스럽게 긴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여 시를 학문적으로 깊게 연구할 게재도 아니고 또 그럴만한 상황이나 여건이 마련된 것도 아니니 전문적인 시론은 뒷전으로 밀어놓고 우선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론을 알아보자.

시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소재 찾기’ 와 ‘기초 단계에서의 함정 알아보기’ 가 바로 필자가 오늘 제시하고자 하는 화두이다.

한 마디로 시는 어떤 설명을 해서 독자를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 장면이나 풍경을 보여줘서 독자를 감동시키는 것이다.

시는 드라마와 소설보다 그런 점이 더욱 강한 장르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느낌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 생각과 느낌이 들 수 있는 풍경이나 장면을 만드는 작업, 그림이 아니면서 그려내는 것이 바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의 소재로 가장 좋은 것은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상황들이며 우리에게 항상 어떤 느낌을 주는 가벼운 존재를 먼저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출근하는 길에 늘상 들르는 편의점, 외출할 때 이용하는 전철이나 버스, 친한 동료, 미운 친구, 개성 있는 이웃, 업무 시간에 만나는 거래처 사람, 사랑하는 가족들, 쇼핑 때 일어났던 일 등을 다양한 소재로 할 수 있다.

이런 소재들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고 우리와 얽혀있는 끈끈한 사연과 톡톡 튀는 개성도 지니고 있기에 충분히 소재로 하여 잘 쓸 수 있는 것이다.

거기 반하여 경계해야 할 소재들은 우리가 잘 모르는 소재, 즉 자세하게 보지 못했거나 직접 체험하지 않고 막연하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재들을 들 수 있겠다.

산, 바다, 나무, 별 등의 아름답고 화려한 자연이나 숙명적인 인간관계 등을 소재로 해야만 멋진 시가 창작되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기성 시인처럼 멋있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그런 강박 관념이 시 창작을 더 어렵게 한다.

집에서 일어났던 작은 상황이나 대화 한 마디만 써도 시가 될 수 있다.

요는 독자가 읽고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예술적 표현보다 중요한 것은 ‘나 혼자만이 포착한 장면이나 풍경’을 보여지고 느껴지는 사실 그대로 쓰는 것이다.

구태여 있지도 않았던 일을 추측하고 급조하여 억지로 지어내려고 할 필요는 없다.

무리하게 작위적으로 상황을 꾸며대는 건 독자에게 던지는 섣부른 도전장이며 하나의 얄팍한 속임수 밖에는 안 된다.

단, 시 창작의 장르적 특성 때문에 경계해야 할 함정 몇 가지는 분명하게 있으니 기본적으로 다음의 사항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첫 번 째로 ‘물음표, 느낌표, 말줄임표 등의 부호는 가능한 한 자제한다.’

이 세 가지 문장부호는 그 부호 자체로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자신의 느낌을 말로 설명해 주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그래서 잘못 쓰면 자칫 이중적 표현이 되어 해설자가 있는 드라마와 다를 것이 없어진다.

따라서 지루하고 건조한 연설문을 대하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또한 문장 부호를 많이 쓰면 읽는 사람은 도리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두 번 째는 ‘구체적으로 써야 한다.’

예를 들어 냉정한 여자를 표현하고 싶다면 단순히 ‘얼음같은 여자’ 가 아니라 그 여자가 어떻게 얼음같은지를 그림으로 그려내듯이 쓰는 것이다.

사랑, 이별, 눈물, 슬픔, 기쁨, 배신 같은 추상적 단어도 될 수 있으면 자신이 없는 한 시의 표현으로 자제해야 한다.

물론 꼭 써야 더욱 맛깔스러워지는 상황이라면 구태여 배제할 필요는 없다.

세 번 째로는 ‘꼭 써야 할 말만 쓴다.’

시는 소설과 달리 짧은 형태의 문학이므로 꼭 써야 할 말을 골라 쓰는 것이 좋다.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내가 손을 뻗으면 손마저 달빛이 될 것 같다” 이 말을 시로 쓰고 싶다면 “하늘로 뻗은 손 달빛이 되다” 라는 한 문장으로 함축시켜서 표현하면 충분하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상투 언어에서 벗어나 시에 어울리는 시어로 표현해내는 ‘낯설게 하기’ 기법을 익혀야 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고 좀 더 신선하고 멋있는 음절이나 단어는 없을까 하고 궁금해 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정신으로 긴장을 살려나가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다분히 감상적인 시는 분위기로 밖에 남지 않으며 더 이상의 진전은 기대하기 힘들므로 시 자체와 시적인 것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시적은 것은 시의 알맹이가 아니다.

시적인 것에만 너무 붙들려 있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시가 긴장하여 생각의 자유를 성취하는 순간 자신도 깜짝 놀랄 구절이 튀어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적이되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정신’ 을 지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이미 어떤 격식에 사로잡혀 있는 국화빵의 틀에 찍혀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을 깨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흔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틀을 깨는 과정으로 술(알콜)의 힘을 빌어야 좋은 문장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술을 도구로 하여 얻어지는 상태가 과연 진짜 자유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자유를 빙자한 핑계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

그런가 하면 좋은 여건이나 상황에 처해야 시상이 잘 떠오르고 여행이나 방랑 중에 진정한 걸작이 창작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 또한 자신들이 설정해놓은 피상적인 관념의 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다.

미국의 자연 사상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 는 이렇게 말했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고 전율하지 않는 사람은 한 물 간 사람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일몰과 일출을 보는 습관을 가져라.”

그는 자연에서 생의 전율을 느끼라고 충고한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전율을 많이 주는 것은 무엇일까 ?

시는 정신적으로 전율을 느껴야만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려면 전율할 줄 아는 힘을 가져야 한다.

표현과 기교는 차차로 연습할 수 있지만 감동과 전율은 연습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전율은 비단 자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일상에서 보다 더 친밀하게 순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일상적인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단단한 생각에서 나온다.

이때의 경험은 구체적 언어를 이끌어 내준다.

단지 감상만 갖고서는 시가 될 수 없으며 좋은 시는 감상을 넘어서야 나올 수 있다.

시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개인을 넘어서야만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상적인 시만 계속해서 쓰면 아집에 갇히게 된다.

그러므로 아집은 넘어선 보편적인 나 만의 시를 쓰도록 해보자.

시를 쓰는 일이란 끊임없이 누군가를 격려하는 일임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된다.

“내가 정말로 시를 쓸 수 있을까?” 라고 의심하지 말고 신념을 갖고 시를 써보자.

나의 시를 내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어주겠으며 나의 시에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 누가 감동해 주겠는가 ?

가을이, 가을하늘과 가을바람과 가을햇살과 가을의 숨결이 우리보고 얼른 시를 쓰라고 저리도 현란한 몸짓으로 채근하는데,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나 스스로가 인정하는 시인이 되어 가을의 시를 한 편씩 써서 책갈피에라도 꽂아놓고 먼 훗날 여유있는 미소로 되새김 해보도록 하는 것도 삶에 있어서 또 하나의 멋진 운치가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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