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

가을은 창문을 열어야 보인다. 무작정 떠나야 만난다. 떠나면서 가을의 숨소리를 들어야 느낀다. 차창을 열고 들녘을 보라! 비록 내가 심어 놓은 추수할 곡식은 아니더라도 황금알이 조랑조랑 달려있는 벼들이 눈부시다.

또 부러질 듯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과일을 바라보면 배가 부를 것이다. 가을은 입으로 말하지 말고 마음으로 말을 해야 느낀다. 이글은 가을을 예찬한 ‘어머니의 사진’ 중에서 따온 정여수 작가의 작품 내용이다.

흔히 봄은 꽃과 다투고 여름은 태풍과 싸운다고 하지만, 가을은 다투지 않는다. 내려놓을 뿐 자기 비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을을 예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가을은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벌거숭이가 되어 겨울로 간다. 가을은 시(詩)가 있는 계절, 가을에 숲을 거닐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로맨티시즘의 주인공이 된다.

조각달을 물고 기러기가 돌아가는 길, 그 가을 길에 노오란 은행잎이 가득하다. 가을은 바람의 수다가 있어서 좋다.

가을바람에 뒤척이는 나뭇잎들 한 잎 한 잎 돌아눕고 마음 흔들리는 가지에 외로움의 등불을 걸고 혼자서 즐기다 취해 봄도 좋을 것이다.

곱게 물든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다. 아름다운 정취와 서정을 만나 볼 수 있다. 그것은 오직 가을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흔히 처서(處暑)를 두고 하는 말 중에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고 했다.

바로 그 처서가 지난지도 한 달이 지났다. 아무리 사는 일이 팍팍하다 해도 높아진 하늘이 가을을 실감케 한다.

폭염이 제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자연의 섭리는 어느 덧 조석으로 조금은 시원한 바람이 청량감을 준다. 하늘의 코발트색이 나날이 짙어지고 있다. 분명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가을이다.

이제 지나간 백로와 함께 귀뚜라미의 합창도 시작됐다. 곤충 학자에 의하면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는 기온이 섭씨 24도 내지 26도 일 때 가장 높고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어 가을을 만끽 할 수 있을 것이다.

태풍도 폭염도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빗줄기도 시간의 굴레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민족의 대 명절 추석도 지났다.

들녘의 벼도 머리를 숙이고 수확을 기다린다. 이렇게 자연은 호된 시련을 주기도 하고 또 반드시 인간에게 안식과 수확을 주기도 한다.

가을의 기는 곧 우리의 옷소매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는 아직도 국민이 걱정해야 한다. 국민에게 오늘의 확실함과 내일의 청사진을 알려줌 없이 그 자리에서 맴도는 꼴이다.

가을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결실의 가을, 수확의 가을이라고 하지 않는가. 올 가을에는 흐뭇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귀뚜라미의 소리를 들어봤으면 한다. 자연의 시련을 넘겼다는 안도보다 새로운 용기와 의욕이 필요하다.

경제의 어려움은 장기화되고 많은 중산층이 일자리를 잃고 소득이 감소하는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힘을 잃어버린 정치에 이 찬란한 가을과 더불어 새로운 영감과 힘과 용기를 불러 넣어야 한다. 자연의 시련은 계절과 함께 사라질 수 있지만 인간이 저지른 재앙은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한다.

우리는 저 푸른 창공을 바라보면서 이 가을을 멋있고 맛있게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가을의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 아름다운 결실의 가을이다. 삶의 보람이 주렁주렁 열렸으면 한다. 아름다운 인생의 가을이다. 자연이나 인생이나 가을은 아름답고 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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