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있어서

 

예전의 그 추억이

지금의 날 있게 한다

 

새벽비 술렁이는

시골 좁은 풀밭길을

밤 새 걸어 발 부르터

안스러이 매달리던

갈래머리 소녀 입김

목덜미 간지러워

키득이던 그 추억이,

 

긴 긴 밤 몇날인가

하이얗게 지새우며

벽지도 잇고 포장지도 이어

깨알인 양 곱게 적은

수줍은 사연

두루마리 돌 돌 말아

건네받던 그 추억이,

 

풀벌레 울음 소리

달빛 어린 물결 소리

모닥불 피어 오른

개울가 깊은 밤 소리

조약돌 의자 삼아

통기타 소리 맞춰

노래하던 그 추억이,

 

세월 훌쩍 뛰어넘어

반백 되어 뒤돌아 서

되찾은 기억 저 편

아련히 그리운데

세상사 변한 감성

흐르는 인생이언만

아직도 여전한 그 추억이,

지나쳐간 그 추억 있어서

지금의 날 밀어간다

[시의 창]

‘추억’이라는 단어는 ‘그리움’과 직결된다. 그래서 우리는 ‘추억’이라 쓰고는, 때로는 ‘보고픔’이라고, 혹은 ‘기다림’으로도 읽는다. 그런가 하면 추억은 ‘아름다움’이나 ‘간절함’, 또는 ‘따스함’과도 맞닿아 있다.

그만큼 추억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쉼 없이 잇닿아 생겨나는 상상과 기억의 파노라마를 펼쳐준다. 그래서 추억은 언제나 다채롭다. 그리고 아련하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먼 길을 가게 한다, 마치 보헤미안 방랑자를 만들려는 듯.

우리에게 추억은, 꿈 못지 않게 중요한 삶의 영양분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만일 추억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색깔의 일상편린 뿐일까, 생각만으로도 갈증이 난다.

물론 추억이 다 그렇게 한 가지로 어여쁜 건 아니다. 되새기기조차 버거운 삶의 무게나 멍에를 그대로 담고 있는 과거의 기억이라던지, 차라리 잊고 싶은 쓰라린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게 만드는 원망스러운 추억도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전부를, 추억의 모든 페이지를 한데 버무려 가슴에 새기면서, 오늘과 내일로 이어지는 여정에 흩어 뿌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삶을 일컬어 ‘추억을 생산해가는 세월의 톱니바퀴’라고 했던가? 그렇게 우리는 살면서 소중한 추억들을 만들어 간다.

그 추억을 떠올리면 때론 힘들어도 입가에 웃음이 맺히고,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 눈물이 흐를 때도 있다. 그래서 세월은 추억을 만들고,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아간다고도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경우에 따라서는 시간이 그 추억마저도 빼앗아 가버리곤 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나 잊을 수 없는 사랑과 기억을 빼앗기게 될 때, 사람들은 죽음보다 깊은 절망과 아픔을 느낀다고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애석하게도 스스로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추억을 너무나 쉽게 잊어가기도 한다.

잊으면서도 그 잊는다는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추억, 그것이 그리움인 것이다. 아무튼 오늘은 작심하고, 별로 곱지는 않지만 필자의 지난 추억록 중에서 발췌한, 잊을 수 없는 기억 한 가지를 써보려 한다.

젊은 시절 필자는 몇 번의 부침을 거듭하면서 실로 평탄치 않은 삶을 이어왔다. 한 마디로,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롤러코스터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순식간에 성공과 실패를 번갈아 경험하였기에, 가까운 주변의 사람들에게 본의 아니게 많은 피해와 누를 거듭해서 끼치곤 하였다.

돌이켜보니 거의 30년 쯤 전의 일이다. 한 번은 사업에 부도를 내게 되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졸지에 거리에 내몰리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동가숙 서가식하면서 근근이 여러 지인들에게 신세를 지기도 하였지만, 의도한대로 해결의 실마리가 신속하게 풀리지를 않자 결국은 여관방을 전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수중에 일용할 경비마저 말라버리게 되자 선택의 여지없이 부득이하게 찾아든 곳이 고시원이었다.

애초에는 나이도 있고 해서, 어디 싸구려 월세방이라도 있을까 하여 수소문해보았지만, 사람이 살만한 정도의 방은 무서울 정도로 비쌌다. “허기사 상황이 이런데 고시원에서 사는 게 뭐 어때서?” 처음에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속죄의 기분이기도 하였고, 재기를 다지기 위한 몸부림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라도, 이 정도의 고통이나 난관은 감내해내는 것이 기본 도리이리라는 다짐과 오기도 약간은 얹혀졌다. 그러나 삭막하고 암울한 고독의 밥을 눈물에 말아먹으면서, 막연한 기대와 허망한 미래의 꿈 을 반찬 삼아 꾸면서, 고시원에서 2년여를 살아보고 내린 결론은, 인간이 사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잠잘 공간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총무라는 사람이 방 스위치를 켜면서 말했다. “이 방이 12만원이구요. 17만원 짜리 옆 방도 있는데 보시겠어요?” 17만원 짜리 방은 당시 필자에게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아니요, 이 방으로 할게요.” 방 값으로 15만원 이상을 쓸 수는 없었다.

고시원은 이미 소문으로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고, 또 실제로 많이 봐오기도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조카가 재수학원을 다닐 때 종종 방문하곤 했으니까.

그 강남 일대의 고시원보다는 그래도 이 방이 훨씬 넓다. 잘 하면 다리도 뻗을 수 있을 듯 하니까. 단지 아주 작은 문제라면 창문이 없다는 것 정도. 어떠랴,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했거늘.

창문이 없는 방에서 불을 끄면 완벽한 어둠이 된다. 마치 이 공간과 나 자신이 모두 사라지는 듯 하다. 덤으로 알게 된 사실은, 밤하늘이 무척이나 밝았었다는 기억이다. 뿐만 아니라 시간의 상대성 또한 절실하게 경험할 수 있다.

낮이니 밤이니 하는 단어들은 이 방에선 효용이 없다. 스위치를 올리면 낮이고, 끄면 밤이 된다. 그 방구석에선 나 자신이 밤과 낮을 결정짓는 신이었다.

창문이 없는 방에서는 공기조차 멈춰 있다. 장마철이 되자 무겁고 뜨거운 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문을 열어두고 잤는데, 통로 쪽의 시원한 바람과 함께 누군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함께 들어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얇은 베니어판 칸막이로 옆 방 사람의 숨소리마저 정확하게 전달되어지는 무방비의 공간이지만, 그래도 막상 잠을 자면서 문을 활짝 열어놓기는 싫었다.

똑바로 누워서 팔을 벌리지도 못하는 비좁은 공간이지만, 그렇다 해도 최후의 보루를 공개하여 마지막 치부마저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기는 싫었다.

그래도 숨이 막히는 건 더 어찌할 수가 없는지라, 선택의 여지 없이 여름 한 철은 그럴 수밖에 없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면, 발치에서 누군가가 슬그머니 잡아당기는 듯 해서 소름이 끼치곤 한다.

게다가 때론 가위에 눌려, 고함이라도 지르면 금새 공공의 적이 되곤 한다. 비몽사몽간에 그 누군가와 십여분을 사투하고 난 뒤에야 간신히 일어나곤 했다.

그렇게 창문이 없는 방에서 몇 개월을 버티면서 허드렛일일망정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변두리 학원강사, 학원생 등원차량 운전기사, 리어카 고물장사, 전단지 배포원 등등.

그리고 이윽고 5만원을 더 주고 창문이 달린 방으로 옮겼다. 그 방에서의 첫날 밤은 40년 남짓 짧은 생애에서 손에 꼽을 만큼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노을과 서울의 야경이 참 아름답다는 감상적인 생각도 잠시, 불편함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그곳도 전혀 방음은 되지 않아 청각적으로 완전히 개방된 공간임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 외에도 고시원은 소소한 규칙과 제약이 수두룩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는 시간은 아침 6시부터 두 시간 정도이다. 그 시간을 놓치면 한 겨울에도, 찬 물이라고 할 수도 없고, 미지근한 물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야릇한 물이 나온다.

물론 총무에게 더운 물 좀 틀어달라고 하면, 한두 번은 그냥 보너스로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별도의 성의 표시가 필수적이다.

아니면 물을 틀어주면서 얼마나 궁시렁대며 시집살이를 시키는지, 웬만한 강심장 아니고는 여간해서 뒷꼭지가 땡겨 물을 쓸 수가 없다.

고시원살이 3개월 정도 되면, 대충 같이 사는 사람들의 면모를 알게 된다. 복도와 화장실, 세면장, 주방 등을 공용으로 사용하게 되니까,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고시원은 학생들만의 거주 공간이 아니었다. 회사원, 외국인, 취업 준비생, 또한 동병상린을 느끼게 되는 낙오자들을 망라하여 돈 없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밀집한 곳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 고시원에서 5년 째 살고 있다고 했는데 완전 터줏대감인 셈이었다. 그를 보면 연민 보다도, 나도 그처럼 여기를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내가 그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반가움 보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이 두려움은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이어서, 고시원의 불문율은 가급적 서로 안 마주치기와 투명인간처럼 대하기이다.

그 무언의 약속 안에서, 그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철저하게 고립된다. 아마 밤 중에 누군가가 살해를 당한다면 복도에는 분명히 ‘밤에는 비명을 지르지 맙시다’라는 포스트잇이 한 장 붙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 속에서의 고립이 주는 외로움, 이것이 고시원 생활에서의 가장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었다는 회고가, 지금은 먼 옛날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추억이 지금의 날 있게 만들었다.

누구나 살다가 언젠가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고 싶을 때가 있다. 지금 얼마만큼 와 있는 건지, 그 끝은 보이는 건지, 살아온 나날을 평가하긴 이를지 모르지만 빛바랜 사진첩을 펼쳐보며 뜻 모를 미소와 한숨을 내쉬어보기도 한다.

여기저기서 추억의 이미지들을 모아보고, 스스로 장만한 추억록에 소중히 담아넣고, 살며시 꺼내보고 하는 동안에 우리는 지난 시절을 향한 그리움에 한껏 몸살 난다.

시간을 병 속에 모아둘 수 있다면, 제일 먼저 하고픈 건 영원한 세월이 흐를 때까지 하루 하루를 모아 두었다, 언제까지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다.

만일 하루 하루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다면, 만일 말로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소중한 나날들을 보석처럼 모아 두었다 몇 번이라도 다시, 지금의 사랑하는 이 사람들과 함께 보내련만, 정작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나면 그 일들을 할 시간이 충분치 않을 것 같아, 이곳 저곳 두리번거린 끝에야, 시간을 함께 보내고픈 사람이 바로 그들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 같아 여간 조바심이 나는 게 아니다.

정녕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과 꿈들만 담아두는 상자가 있다면, 그 상자 속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을 것을, 그 소망과 꿈들이 소중한 추억에 의해 이루어졌구나, 하는 기억 외에는. 이제 필자는 추억에서 배운 대로 추억을 다지며, 소박한 추억의 반죽을 빚어본다. 지금까지 내가 있게 만들어주었고, 다시 내일 내가 살아가게 만들어줄 추억이니까 말이다.

오늘은 바로 어제의 다음 칸이고, 내일은 오늘의 다음 칸이다. 어제의 추억이 오늘을 만들었고, 오늘이 추억이 되어 내일을 새길 것이다. “장애물 때문에 반드시 멈출 필요는 없어요. 벽에 부딪힌다면 돌아서서 포기하지 말아요. 어떻게 벽에 오를지, 뚫고 갈 수 있을지, 돌아갈 순 없는지 생각해봐요.”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의 말이다.

저작권자 © 서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