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주필, (시사·문학)평론가 정종암

터키 아나톨리아에 가면 트로이 유적지가 있다. 지금쯤, 그 언덕 풀 섶에는 개양귀비가 피어있겠다. 트로이는 관광에 치중하거나 의미를 두지 않고, “시골영감 5일장에 가니 나도 따라 간다”는 식이면, 대체적으로 볼 것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곳에 가면 고대 유적지 9개 층계 위, 외롭게 서 있는 올리브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가 섰다가를 반복하는 악취미가 있다. 아래로 넓은 평원이 펼쳐지면서 저 멀리 에게 해를 바라볼 수 있어서다. 고대국가 간의 전쟁으로 병사들의 사체가 득실거리겠지만, 그 바다는 친근하면서도 포근하다. 그 유적지 입구에는 영화 <트로이>의 목마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트로이 목마가 반긴다.

보잘 것 없이 조성했으나, 전설이 아닌 역사 속, 이 목마로 인해 그리스연합군을 번번이 코너에 몰던 트로이 성은 무너졌다. 난공불락의 성은 불타고, 전리품을 챙기고 각자의 고향인 그리스의 섬들로 귀환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유독 그 고향 이케타섬 귀환에 있어, 10년이란 세월을 소비한 용장 오디세우스가 있었다.

그에게는 20년이나 기리며 정절(貞節)을 지킨, 그의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있었겠다. 이들을 해후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고대그리스 시인 호메로스(Homeros)의 작품인 <오디세이아(Odysseia)>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20년 세월은, 트로이 전쟁기간 10년을 더하기 때문이다.

아들인 텔레마코스는 퓨로스나 스파르타를 찾아다니면서 아버지와 함께 싸운 이들의 이야기를 듣지만,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오디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하고는 돼지를 키우는 허름한 집에 숨어 있었겠다. 거기에서 아들과 해후하고, 부자가 계략을 꾸민 끝에 거지로 변장하여 집으로 돌아온다. 오디세우스는 평균 수명을 훨씬 넘겨 20년이나 산 늙은 개와 늙은 여종에게 정체가 발각되지만, 계략이 성공한 나머지 페넬로페가 제안한 경기에서 구혼자들의 허점을 찔러 한 명도 남김없이 죽인다.

그리고는 다음날, 늙은 아버지 라에르테스와 기쁜 눈물의 재회를 한다. 살해된 구혼자들의 친족 간 싸움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도 신들의 중재와 보살핌에 의해 제지되면서 끝을 맺는다.

이러했음이 대충적인 줄거리이다. 20년 정절(貞節), 인류 역사상 이러함이 또 있었을까. 수많은 구혼자들의 꾐에 넘어가지 않고 정절을 지켰음에, 툭하면 서로를 짓밟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는 현세의 부부관계가 씁쓸함을 더한다. 그의 부인 못지않게 오디세우스도 요정 칼립소의 달콤한 사랑도 포기했거늘, 얼마나 위대한가. 이에 이혼사유 여섯 항목을 나열하는 우리나라 민법 제840조가 유명무실할 만하다.

인류 최초의 영웅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의 주인공이 영생을 추구하였다면, 오디세우스는 목숨보다 명예를 중시한 영웅이었음이다.

여기서 살아 돌아간 영웅 중, 또 다른 영웅 아에네이스만은 언급 않을 수가 없겠다. 그는 오디세우스처럼 방랑하다가, 이태리로 휩쓸려가 로마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필자가 에게 해의 웬만한 각 섬을 유랑한 결과로 보건대, 가능한 예기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에게 해를 건너고 이오니아 해를 접하면 바로 이태리 땅이기 때문이다.

자킨토스란 섬도 있다. 꼭 악어처럼 생긴 이 섬에, 아름다운 나바지오 해안의 절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터키에서 밀수담배를 싣고 이태리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난 나머지 처벌이 두려워, 이 해안에 강제로 하선하고는 도주한 사건이 있었다. 그 철선이 관광 상품화 돼 있다. 시청한 적은 없지만, ‘태양의 후예’란 우리나라 극이 촬영되기도 했다. 그만큼 그리스와 이태리는 바다를 사이에 둔 인접국이다. 에게 해를 사이에 둔 터키와는 그리스가 친한 관계가 아님에,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처럼 닮은 점이 있다.

성경에도 등장하는 고린도운하가 있다. 훗날 코린토 동맹으로 유명한 그곳에서 약 7km를 건너면 두 국가를 잇는 이오니아 해임을 볼 때, 트로이 전쟁에서 전리품을 챙긴 영웅들이 풍랑을 만나거나 하면, 그렇게 갈 수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태리에서도 아에네이스를 시조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헤르메스(Hermes)가 저승길로 일찍 안내한 죽은 영웅도, 살아서 귀환한 영웅도 함께 누빈 애게 해는 오늘도 넘실댄다. 언제나 에머랄드 빛을 발하는 에게 해는 고대 역사의 보고로, 질리지 않는 바다이다.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이 어려운, 호메로스 작품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서양문학의 첫 장을 열었다. 기원전 1200년경의 사건을, 기원전 800년경에 구전으로 성립된 최고의 걸작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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