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시스의 새벽

 

새벽으로 임 가시네

나 예 두고 그냥 가시네,

잠에선 진즉 깨어났건만

자는 체 하는 걸 임은 모르시지

 

잘 가시라-

짧은 인사조차 매듭짓지 못하고

뒷모습 보기도 전 쏟아질 눈물인 걸

 

계절로 난 길 따라 바람이 불고

머리내음 가시지 않은 베갯머리에

소리 없는 그림 그려 얼룩이 지면

세 평 누리 드리워진 고적의 바다

 

몸은 가도 마음 예 두니 정작 이별은 아니라,

말도 안되는 위로로 체면치레 대신 마오

남겨지는 외롬이 얼마나 커도,

속으로 속으로 가슴 하마 해져도,

차마 붙들지 못하는 걸 임은 정녕 모르시오

 

찬 서리 매운 바람 한 움큼 던져놓고

마음 얹어 남겨둔들 무삼 소용 있으리,

정녕 이별 아닐지라도 임 가시고 예 없거늘....

 

메아리, 그림자, 흔적, 카타르시스-

안개 짙은 새벽으로

긴 긴 여운 또 솟아나

긴 긴 하루 또 열리네

시의 창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7080가요 중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애절한 여가수의 독특한 창법으로 널리 알려진 국민가요 중의 하나이다.

제목 자체에서 풍겨지는 뉘앙스 만으로도 바로 남녀의 특성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나타내고 있다는 걸 쉽사리 알 수 있다.

이별이라는 전제라면 남자는 떠나가고 여자는 남겨져 기다린다는 역할 분담이다.

이별 앞에서라면 누구나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 별 하자 없이 받아들일 현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여자는 배 남자는 항구’라고 하여 서로의 입장을 바꾼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런 제목은 아무도 인정 못할 것이다.

어쩌면 미풍양속을 해치는 선동적 가요라고 하여 금지곡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가 배처럼 사방팔방 마음대로 돌아치고 남자는 항구인 양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런 여자를 다소곳하게 기다리고 있는다?

에이! 한 마디로 언어도단이고 어불성설이다.

그런 모양새의 노래라면 애저녁에 유행될 리도 없다.

그러니 고금동서를 통해서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가 이 노래의 제목에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는 거라고 여긴다는 건데, 과연 시절의 흐름을 망각하는 필자의 망상이며 망언일까 ?

아무튼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고 사회의 풍조가 날로 변화하는 현대에 와서는 남녀의 구분이 애매모호해지고 어느 분야에서나 성별의 차이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오늘날이기에 구태여 남성의 역할이니 여성의 몫이니 하는 구태의연한 구분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그런 연결선 상으로 여성의 인권을 부르짖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버린 과거사의 외침이 되어졌고 남녀 평등의 시대를 넘어서더니 오히려 여성 상위 시대의 현상이 도처에서 심심챦게 보여지고 있는 이 시기에 새삼 남녀의 구분을 논하자는 건 더더욱 아니다.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많은 분야에서 분명히 여성의 역할이 남성의 영역을 넘어서서 이미 수많은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맡은 바 책임과 업무를 잘 수행해내고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는 해도 막상 그 점을 증거로 제시하여 막무가내로 남녀의 구분을 완전히 다 허물어버리자니 왠지 뭔가가 좀 부족하고 괜히 허망하다.

감성적이며 낭만적인 관점으로 바라봐주어야 할 어떤 영역에서라도 그냥 좀 내버려두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니,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스럽게 입장 정리되어 서로를 바라보면서 따스한 마음으로 교감하며 사랑하고 보듬어주는 각자의 역할이 아직도 어딘가에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축복받는 남녀의 결합과, 서로를 의지하고 안아주는 사랑 안에서 영원한 행복과 안락이 싹틀 수 있는 터전이 만들어지고 기쁨도 쑥쑥 자라나는 것이라면 말이다.

물론 그 마저도 관점에 따라서 해석의 각도가 다를 수는 있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제는 남성의 독자적인 영역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만큼 아예 없어졌다고 해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이다.

그만큼 남녀 능력의 근본적 차이나 성적인 구분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음이다.

이른바 ‘유니섹스’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던 시절만 하더라도 남성 편중화되어 있던 분야로 점차로 진행되어 나가는 여성의 영역 확대나, 여성 고유의 이미지를 벗어나 중성화되어지는 생활의 패턴이 조금은 낯설게 여겨지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래서 어떤 직업이나 호칭 앞에 여성의 경우 접두사처럼 ‘여류’ 라는 말을 덧대어서 사용하거나 꼭 ‘여’자를 붙여서 불렀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당연시 되어진지 오래이니 구태여 ‘여사장’이니 ‘여형사’니 ‘여배우’니 할 이유도 없고 ‘여류명사’니 ‘여류작가’니 하는 표현도 따로 분류할 필요가 없다.

단지 원론적인 성별의 구분이 요구되는 경우에만 나누면 되는 것이다.

요즘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여군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어떤 분야 보다도 전쟁이나 군대라는 특수한 집단에서는 강한 남성의 역할이 특별히 존중되며 필요시된다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군인과 여성이라는 관념의 연결은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부당하다.

육체적으로 고되고 과격한 훈련의 반복과,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의 극복이라는 면에서 시작되어 궁극적으로 군인의 필수 조건이 완결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통념일 게다.

그런데 막상 여군의 숫자와 분야별 분포가 늘어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결론을 보면 신체적으로 결코 여성이 약하지 만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남성이 지니지 못한 감수성이나 세심함마저 두루 갖춘 여군의 효용성은 지금까지 갖고 있던 통설을 완벽하게 뛰어넘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병영 문화의 창조나, 통제되고 폐쇄된 군생활의 분위기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 정도에까지 도달하고 있는 수준이 되었다.

100년 넘게 유지해 오던 징병제를 2010년 7월 폐지하고 모병제를 도입한 ‘스웨덴’이나 아예 ‘여성 병역 의무화 법안’을 마련하라고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킨 ‘노르웨이’,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절대 강국 ‘이스라엘’의 경우 등을 보면 오늘날 군사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군대 내 여성의 수와 역할을 확대하려는 것은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반적인 추세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여군이 늘어나면 우선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군의 조직 문화이다.

군대의 특징으로 꼽히는 극단화된 남성 문화가 깨지면 자연스레 이와 결부된 비효율성 등도 더불어 극복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군대 내에서 발생하는 비효율이나 인권 침해는 남성의 지배적인 조직에서 흔히 드러나는 남성우월주의나 권위주의, 경직성 때문인 경우가 많은데 이스라엘 같은 강군이 되려면 병사 개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하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를 원천적으로 주도해갈 수 있는 게 바로 여성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군 확대는 사회 전반의 양성 평등 실현과 함께 여성 능력의 최적화 방안 관련 정책 수립에 획기적인 성과와 진전을 거둘 수 있다.

그렇다고 앞뒤 없이 단편적으로 무조건 여성을 군대로 보내 힘든 짐 나누어지자고 필자가 무리한 시대적 선동을 획책하는 바는 결코 아니다.

단지 극한적인 남성만의 구역으로 여겨지던 군대에까지 여성의 역할과 효율성이 보다 더 극대화될 여지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자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의 시를 적으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시선으로 보여지는 여성관을 비교적 장황하게 나열하였다.

물론 제한된 지면에 더 이상의 자세한 추론을 이어가기는 힘들다.

그래서 어떠한 결론이나 맺음말을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여성의 존재 가치를 단편적으로라도 이해하고자 노력하자는 필자의 제안은, 지금까지는 별다른 의미나 생각을 부여하지 않고 의례껏 여성이니까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여겼던 많은 장단점들이, 여성이기에 앞서 당연히 존중되어야 할 인격과 인권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개념 정립을 다시 할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시대적 관점이 필요할 것이고, 사회에 만연된 그릇된 시선이 아직도 있다면 거기에 일침을 가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어떤 ‘이탈리아’ 고급 브랜드는 2011년부터 여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10분 분량의 ‘여성의 이야기(Women’s tale)’ 시리즈를 매년 두 편씩 발표해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서 흑인 여성 최초로 감독상을 받은 시리즈의 제작자는 “영화 제작은 우리 브랜드가 여성의 삶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며 “영화에 우리의 브랜드인 옷이 나오긴 하지만 부수적인 것일 뿐이며 근본적인 영화의 주제는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영상과 스토리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자사의 브랜드 철학을 알리는 ‘브랜드 필름’이 최근 새로운 마케팅 수단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브랜드 필름은 제품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던 과거의 노골적인 ‘애드 무비(광고 영상)’나 드라마에 제품을 노출하는 ‘간접 광고(PPL)’와는 내용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최근에는 ‘제품을 얼마나 잘 보여줄 것인가’ 보다 ‘브랜드의 철학과 가치를 어떻게 다르게, 다양하게,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줄 것인가’가 더 핵심적인 마케팅 목표로 떠오르고 있는데 그것이 전적으로 오늘날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사회 현상의 대변이며 그 대표적인 화두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바로 ‘여성’이다.

모름지기 ‘여성’은 영원한 마케팅의 목표인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모든 꿈의 절반 이상이 ‘여성’의 몫이며 그 ‘여성’이 오늘과 내일의 역사와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 주체임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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