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영겁의 세월 먹고

하이얀 포말로 산화되는

나는 파도,

칠십 오만번이나

쉬임없이 해안선 넘나드는

나는 파도,

 

하루의 살이인 양

내 하루 삶 온전히

그대 향해 열렸나니 오로지

그대 마음속 각인키 위한

내 칠십 오만차례의 사랑

넘쳐나는 정열

 

하루에 다 쏟아부으리,

백천의 세월 흘러도

새로이 시작되는 영원 앞에 서서

그대 눈속이라야

이윽히 나 전율타가

이내 숨 죽이리

 

시의 창

모름지기 역사는, 기적은, 창조는 어마어마한 분위기를 전제로 하는 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나 진리들이 복잡하고 거창하고 장구한 준비와 절차를 갖추어야만 비단 그에 합당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선각자나 주인공은 늘 무엇이든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즉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요는 그렇게 항상 채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실질적인 과정은 겉보기에 지극히 미미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사람이라야 쉽사리 심오하고 거대한 결과물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 진실에 근접하는 답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나 결과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선결되어야 하는 기초적이고 우선적인 조건들을 무시하고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단단한 기초 위에 쌓아 올리는 건축물이 튼튼한 건축물이라는 건, 불변하는 대자연의 진리처럼 익히 알고 있는 명제이다.

대자연의 질서란 참으로 신비롭고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많은 가르침을 준다.

우리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기에 대자연의 질서는 우리의 삶에도 어김없이 적용이 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절대자의 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생의 기초 질서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수레의 바퀴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수레를 끌 수 없듯이, 아니면 바퀴 하나의 크기가 작으면 전체가 뒤뚱이고 덜컹이듯이, 부모 자식 간에 또 형제 자매 간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해야 할 몫에 성실하지 못하면 기초 질서에 균열이 오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 균열은 아주 미세한 충격과 자극에도 크게 반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서로 상호 보완이 잘 이루어진다면 아무리 커다란 위기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그 극복이 어렵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특출난 존재가 따로 있으면서, 교만하거나 거만하지 않고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도 않으며 상호 양보와 협력의 상생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점이어야 한다.

‘스티븐 코비’와 ‘로저 메릴’의 공저인 ‘제 4세대 시간 경영 -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에는 이런 글이 있다.

‘사는 것에서 자만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수입이 자신의 요구에 맞는 지 어떤 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신의 수입이 다른 사람의 수입보다 많은 지 어떤 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외모(머리카락, 옷, 체형)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한다.’

그 모든 자만의 뿌리는 비교라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절대 가치란 비교로부터 자유로울 때만 존재한다.

행복의 가치 또한 다르지 않아서, 모든 우월성을 상대적으로 평가를 한다면 그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때론 자만하게 되고, 때론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더욱이 삶이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만함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만족하고, 그 만족함이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그런 삶이라면 그건 어떨까?

살면서 언젠가 한 번 쯤 이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들 평탄하게 잘 들 살아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늘 어려울까?’

‘남들은 아우토반 고속도로처럼 잘 나가는데 내 길은 왜 맨날 울퉁불퉁 가시밭 길일까?’

그렇게 우리는 남의 손에 쥔 떡을 크게 보고, 내 손에 쥔 액을 더 크게 본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가진 것을 질투하고 그 사람을 미워하고 급기야 험담까지 한다.

‘위대한 캐스비’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 사람을 욕하기 전에 그 사람이 지금 지고 있는 짐을 헤아려 보라.’

그 어떤 사람도 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의 등에도 내가 모르는 그만의 짐이 얹혀 있다.

그 짐은 내 짐 보다 더 무거울 지도 모른다.

또,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금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을 평가하기 전에 그 사람의 신을 신고 세 달만 걸어보아라.’

그렇게 그는 나 보다 더 불편한 신발을 신고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걷는 길 보다 훨씬 험난한 사막을 그가 걷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헌 신짝같은 자존심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누군가에게 민폐일 거란 생각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다.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일종의 자기 포장이다.

어쩌면 열등감이 심한 사람일수록 그 포장은 더욱 화려할지도 모른다.

때론 자기의 치부를 더욱 크게 부각시킴으로 열등감을 만회하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지향하는 것은 같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그 포장으로 우린 그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된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몫의 복이 있고, 그 복이란 내가 얼마만큼 받아들여 누리느냐에 따라 내 것이 되기도, 혹은 영영 사막의 신기루처럼 환영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잊지 말자.

내 분량의 복은 내 안에서 거두어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로 모이는데, 그 중심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수레의 쓸모가 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찰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중심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그릇의 쓸모가 있음이라고 한다.

또한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드는데, 그 중심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방의 쓸모가 있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있음(有)이 이로움을 만드는 것은 없음(無)이 쓸모를 만들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있다.

홀로 완전함을 이루기는 어렵다.

음과 양, 밤과 낮이 모여 하루가 형성되는 것이 대자연의 자연스러운 진리이듯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게 일목요연하다.

보여지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화.

실체란 실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는 작은 수단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루어내는 일들과 또한 하고자 하는 일들이 과연 무엇을 위함인가를 생각해보자.

의미없는 듯 느껴졌던 것들이 모여 조심스러운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종내는 커다란 보람으로 승화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공급하기 위한 훌륭한 수단임을 느낄 때 우리 스스로의 삶의 전차에 힘찬 가속을 붙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가족에게나 혹은 일터에서나 우리는 어떤 수단인지를 생각하고 우리가 하는 일에 보람과 가치를 느끼면서 시작하고 맺는 하루 하루들이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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