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삼진의거 100주년을 맞아 창원지역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아본다.

1919년 일어난 4·3삼진의거는 창원지역에서 일어난 항일독립운동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고, 큰 규모의 운동이었다.

창원시 진동·진전·진북 3개면에서 약 8000명이 모였는데, 당시 진동 주민이 2000명이 채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집집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여성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그 시대의 여성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또 다른 억압을 받고 살았으나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은 누구보다 강했던 것이다.

1910~1920년대 마산에는 기독교가 일찍 보급되면서 근대교육기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중 1913년 개교한 의신여학교는 여성들에게 남녀평등·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의신여학교에 다니던 최봉선, 안음전, 김남준, 이수학 등 22명의 여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결사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최봉선의 집에 모여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고, 구마산 장날인 3월 21일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당시 최봉선과 안음전의 나이는 겨우 15~16세에 불과했다. 이후 최봉선은 ‘친일파 김기정 징토(懲討) 시민대회’에도 참여해 군중을 이끌다 1년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최봉선-현 마산의신여자중학교 초대교장 최봉선 (마산의신여자중학교 제공)

▶최봉선은 의신여학교 신사참배 거부로 1939년 폐교되고 해방 후 의신고등공민학교로 재건하여 현재의 의신여중이 됐는데 최봉선은 의신여자고등공민학교와 의신여중 교장을 역임했다.

 

안음전-부산 아동복지시설 ‘새들원’에 있는 안음전 석상 (새들원 제공)

▶안음전은 결혼 후 고향 마산을 떠나 부산에 정착했는데, 해방 직후부터 부산항에서 귀환 동포들을 환영하고 구호하는 활동을 했다.

당시 부산항 주변을 배회하던 고아들을 하나 둘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던 안음전은 아이들의 수가 많아지자 사재를 털어 고아원을 지었다. 국제시장 옆 부산 최초의 아동 양육 시설인 ‘새들원’이다. 새들이란 이름은 새로운 땅(New Earth)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당시 의신여학교 선생들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숨기지 않고 표출했다.

▶양한나는 1915년, 일본왕 즉위를 기념해 학교에서 떡을 돌리자 ‘먹을 이유가 없다’며 반대운동을 펼친 일화로 유명하다. 3·1운동 이후에는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경상도 대의원으로 활약했다.

본명도 따로 있었으나 도산 안창호 선생이 ‘백두에서 한라까지 내 나라를 길이 보존하도록 노력하라’는 격려의 뜻에서 ‘한나(韓拏)’로 다시 지어줬다고 한다.

양한나는 미군정기에 들어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에 취임했다. 이후 부산에서 사회복지활동에 전념하다 지난 1976년 눈을 감았다.

 

김두석-월간 독립기념관 (2017년 8월호)

▶김두석은 의신여학교를 졸업하고 훗날 의신여학교 교편을 잡은 우리나라 여성 독립운동가 중 문화운동부문에서 유일하게 서훈됐다.

그녀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고 식민지정책을 비판해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근대교육을 접한 여성들은 자신의 신념을 주체적으로 표출했다. 이들의 활동과 동시에 그간 내조와 보조 활동 정도로 여겨졌던 여성들의 독립운동도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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