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맞이꽃

 

별 뜨면,
별바래어 황홀하니 피어나는 꽃

사랑 고파서 밤종일 울던 맘
사랑에 흠뻑 겨워 꿈인가 귀 기울이면
야무진 꽃망울 꿈으로 피지

하늘 가득 방울 방울 사랑 맺히면
그윽한 밤 피어나는 꿈맞이꽃

달 뜨면,
달맞이로 소담스레 피어나는 꽃

사랑 기둘려 밤 꼬박 지샌 맘
사랑에 한껏 취해 지그시 눈 감으면
흐벅진 봉오리 꿈으로 피지

아름누리 송이 송이 사랑 익으면
고요한 밤 피어나는 꿈맞이꽃

 

 

-시의 창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먹고 사는 의식주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아무리 좋은 입지 조건과 최상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고객을 위한 최상의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곳이면 사람들은 그곳을 찾아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상품이나 아이템의 품질 수준보다도 서비스와 휴머니즘의 자극의 품질로 경쟁하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가족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살아나갈 새 힘과 용기를 얻기도 하고 진정한 사랑과 화목의 충전을 통해서 기쁨을 만끽하기도 하며 목숨처럼 소중한 가정의 공동체성을 경험할 수도 있는 반면에 오히려 가정이라는 굴레가 살아나가는 데에 부담이 되고 찾아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변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전부터 내려오는 유교적 관점의 가정이라는 경직되고 고착화된 의미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거나 진배없다.

무조건적인 복종과 상하관계의 지속, 가부장적인 가족 분위기, 인간적인 대화가 상실되어진 삭막한 울타리로서의 가정이라면 이는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남의 가정의 툴을 갖고 갑론을박하는 것 같아서 좀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래야만 하는 세상이니 이 노릇을 어쩌랴.

가정이 세상의 어떤 곳 보다도 가족들에게 최상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고 그 구성원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최선의 서비스를 베푸는 것은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삶의 질을 높이는 차원에서 보아도 아주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서비스라고 하면 가정의 용어로는 왠지 낯설다.

이것을 적절한 가정 용어로 바꾸자면 아마 섬김이란 단어가 될 듯 성 싶다.

굳이 현대사회의 변화 추세와 비교할 필요 없이 원래 가정은 가족 상호간에 최선의 섬김을 통해 진정한 기쁨과 감격, 그리고 행복을 주어야 할 분명한 목적을 태생적으로 갖고 있다.

그렇게 섬김을 진심으로 이행하며 서로가 극진한 배려와 양보를 앞 다투어 하는 가정에서 무슨 큰 소리 날 일이 있고 가정 파탄이니 가족 해산이니 하는 이상야릇한 현상이 생겨나게 되겠는가 ?

부부지간에 서로를 의심하고 기만하며 자존심을 내세우고, 부자(부녀)지간에 혹은 모자(모녀)지간에 인간적인 대화가 단절되어 마치 무슨 거래를 하듯이 서로의 의무나 마지못해 이행하는 척 하면서 시간만 때우는 가정의 행태야 말로 우리가 척결하고 타파해야 할 잘못된 모습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평화와 안락한 휴식처로 자리매김되는 가정을 만들기 위하여, 진실로 꿈같이 환상적인 보금자리로서의 꽃으로 피어나게 하기 위하여 가족들 서로가 베풀어야 할 서비스 곧 섬김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가정의 섬김은 감동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남을 위해서도 섬김의 실천을 경쟁하듯 벌이면서 살아가고 있다.

소외된 이웃이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구제나 봉사활동을 소속된 단체와 더불어 진행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진하여 개인적으로도 기꺼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예도 비일비재하게 갖게 되곤 한다.

기업은 기업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주어진 위치에서 기부나 지원을 당연하게 여기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남에게도 섬김을 어렵쟎게 베푸는 게 현실인데 하물며 혈연으로 엮여진 내 가족에게야 무엇이 달라도 다른 이른바 차별화된 최상의 섬김을 해야 하지 않을까 ?

오늘 제시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화두는 바로 자기희생의 섬김이다.

우선은 당연히 위엄을 부려도 무방한 입장에 서있는 가장이나 부모에게 제언하는 바이다.

권위나 엄한 훈육을 통한 가정교육만이 올바른 양육실천의 첩경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편견과 구태의연한 오만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자.

세상이 변했으니까 틀렸다고 여기면서도 할 수 없이 양보한다는 그릇된 견해로는 진정한 섬김의 마음이 나올 수 없다.

마치 희생당하는 기분으로 억울해도 참는다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인내하고 있는 거라는 심정이라면 그 스트레스 속에서 어찌 바람직한 섬김의 마음이 생겨날까 ?

우리의 삶의 공식이라는 게 나중의 삶을 위해서 자녀들에게 미리 투자하는 거라는 쳇바퀴의 논리가 아니다.

마치 노후대비를 위한 보험으로서의 가치인 양 자녀에게 효도의 임무를 부여하고 부모 봉양을 강요하는 걸 무슨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면 그건 너무나도 폐쇄적이고 일방적인 모순이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발상에서는 아무런 해결책을 찾을 수가 없다.

지금 제언하는 자기희생이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종이 되는 것이라고 바꿀 수 있겠다.

물론 이라는 표현 자체는 다소 무리수가 있는 단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자기희생의 섬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상대방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부모가 자녀의, 자녀가 부모의, 부부가 서로의 종이 되고자 할 때 그 가정에서는 진정한 행복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가정의 섬김은 마치 농부의 삶과 같은 것이다.

생명을 심고 자라도록 하기 위해 허리를 늘 굽히는 농부처럼 가족이 서로 먼저 자원하여 허리 굽히는 섬김을 다할 때 우리의 가정은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게 될 것이다.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최상의 파라다이스,

그래서 가족들 모두가 시간을 다투어 찾아들고 싶은 누리,

안락한 평안과 휴식으로 재충전의 발전소가 되어주는 신비한 세계,

밤낮없이 사랑만 영글어 소담스런 꿈맞이꽃으로 피어나 시인을 만들어주는 둥지,

바로 그와 같은 지상천국이 모두 모두의 가정마다에 건설되어져서

비록 가진 것 많지 않더라도, 그리고 권력과 부귀는 넘치지 않더라도 웃음소리가 언제나 끊이지 않는 새해의 나날들이 되어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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