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폭

 

사랑하고,

함께 길 갈지라도

그니는 그니 보폭으로

그니의 길 걷는 것,

 

또,

나는 나의 보폭으로

나의 길 걸어야 하지

그렇게 걸었기에

우리 만나진 것,

 

그렇게 걷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니 모습

영 볼 수 없게 될지도 몰라

볼지라도

그니 뒷모습만

눈물 속에 담을지도,

 

나란히 나아가지 않으면

서로의 얼굴

볼 수가 없어

 

발자국만 보며 걸음 걷다간

절대 얼굴 마주하지 못해

 

서로 자기 길

자기 보폭으로 걸어갈 때만

고개 돌려 옆 보면

그니가 보여,

 

그제사

그니 함께 함

나 알게 되리

 

-시의 창

산악인 ‘엄홍길’은 세계의 고봉인 ‘히말라야 8,000미터 14좌’를 세계에서 8 번째로,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최초로 등정에 성공한 철인이다.

그 중 ‘안나푸르나’ 등정은 5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여러 가지의 사정으로 인하여 3 번을 실패한 후 4 번째 시도 때 정상을 500여미터 앞에 둔 해발 7,600미터 정도의 지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앞서 가던 ‘쉐르파’가 발을 헛디뎌 크레바스로 미끌어져 굴러 떨어지며 서로 연결된 줄로 인해 본인도 같이 굴러 떨어지다가 어느 순간 멈추는 사고가 발발했다.

그가 먼저 멈추게 되었고 연결된 줄이 팽팽히 당겨지면서 ‘쉐르파’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매달려서 멈추게 됐지만 당시 그 ‘쉐르파’의 체중을 그대로 실은 줄을 지탱하게 된 그의 오른쪽 발목이 180도나 돌아가면서 부러져 탈골됐다고 한다.

탈골된 뼈를 맞춰 응급조치를 한 후 힘을 쓸 수 없는 한쪽 다리를 끌고 2박3일간의 목숨 건 후퇴 끝에 하산을 하였고 서울로 긴급후송을 해서 대수술을 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이제 등산은 끝’ 이라는 의사의 판정을 뒤로 하고 5 번째 ‘안나푸르나’ 등정을 감행하여 마침내 정상을 밟았다고 한다.

‘쉐르파’는 인도와 네팔에 사는 산악부족으로 히말라야 산맥의 짐꾼으로 유명하다.

베이스 캠프에서부터의 고산행을 주로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로는 따를 자가 없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원정 루트를 짜고 원정의 전반적인 일을 담당하는 트래킹가이드의 역할까지도 원만하게 수행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가장 높은 정상에는 같이 오를 자격이 없는 심부름꾼임에는 틀림 없는 입장이다.

그래서 보통의 원정대는 ‘쉐르파’의 상황이나 컨디션 등을 고려하면서 등정을 진행하거나 도중에 변경을 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등정의 부속물이나 소모품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취급도 받는다.

그런데 ‘엄홍길’은 그 ‘쉐르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본인의 발목이 완전히 망가지는 상황에서도 줄을 끊지 않고 견디어냈으며 결국 그로 인해 등정을 포기해야 하는, 그리고 본인은 영원한 장애인으로 남게 되는 결과를 감수하게 된다.

그는 ‘쉐르파’를 등정을 위한 도구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산에서 사는 그의 동행자, 친구, 더 나아가서 ‘동반자’라는 생각으로 존중한 것이다.

그러한 숭고한 인류애와 생명 사랑의 협력의지가 그를 세계적인 철인을 넘어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졌다.

‘동반자’는 단적으로 표현해서 내 삶의 반보 쯤 앞에서 나와 더불어 같은 방향으로 삶의 길을 걷는 사람을 일컫는다.

결코 나보다 뒤쳐지는 일이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소중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끝날 까지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며 가족이며, 나의 지표가 되고 삶의 본질이 되어주는 절대적 가치를 ‘동반자’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반자의 역할론’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것이다.

‘필립 켈러’가 쓴 ‘양과 목자’라는 책은 세계적으로 수백만부가 팔렸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로 10년 동안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젊은 시절에 직접 8년 동안이나 양을 키우면서 쌓은 경험과 이론을 토대로 하여 이 책을 저술했다.

양에게 목자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이며 목자는 어떠한 역할을 함으로 양에게 ‘동반자’의 의미가 되어주는가에 대하여 인도주의적으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양을 빗대어 나약하면서도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악하며 이기적인 인간의 면모를 꼬집어 고발하고 있는 듯 하다.

사실 양이란 동물은 체구에 비해 유난히 다리가 가늘다.

그래서 빨리 달리지도, 오래 달리지도 못한다.

또한 눈이 어두워 멀리 보지도 못하는 근시이며 시야도 좁다.

행여 돌에라도 걸려 넘어져서 뒤집히게 되면 절대 혼자의 힘으로는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유난히 식성이 까다롭고 입도 짧고 성격도 까칠하다.

신선한 먹이는 한 번에 많이 먹지를 않고 수시로 먹어야 한다.

들판에 있는 양떼를 보면 한가롭고 여유로운, 그야말로 평화스러운 정경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만일 양이 실수로 뒤집어졌을 때 목자가 재빨리 발견하고 즉시 손을 쓰지 않으면 그 양은 바로 탈이 나고 만다.

맹수나 독사의 습격을 받아서 목숨을 잃게 되는 건 나중의 일이다.

한동안 뒤집혀서 방치되면 바로 배에 가스가 차서 내장 기관이 망가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그 뒤의 일이야 당연지사이다.

그러한 양의 ‘동반자’인 목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양에게 있어서 목자란 그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다.

있으면 좀 편리하고 없어도 무방한 이웃이 아닌 것이다.

영국의 한 신문사에서 ‘영국의 끝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가는 법은 무엇인가’ 라는 현상 공모를 낸 적이 있었다.

‘비행기를 이용해서’, ‘기차를 이용해서’, ‘자동차를 이용해서’ 등등 여러 가지 답이 나왔지만 일등으로 당선된 것은 바로 이런 내용이었다.

‘좋은 동반자와 함께 가는 것!’

자신의 삶을 함께 할 ‘동반자’와 무엇을 한다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랜 시간일지라도 좋은 ‘동반자’와 함께 할 때 그것은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시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바로 지금 아무리 긴 시간의 여행일지라도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동반자’ 하나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의 삶은 정말 아름다운 삶이란 생각이 든다.

자!

이제 우리의 삶에서 ‘동반자’라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는 과연 살면서 수많은 타인들 사이에 어느 누구에게 참된 의미의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는가를 당장 고민해보아야 한다는 건 자명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이웃의 ‘동반자’가 되는 길이고 기꺼이 타인에게 인정받는 역할의 삶이 되는 방법인가도 더불어 생각해보아야 할 일이다.

우리 삶의 본질은 늘 타인의 눈이다.

나만 알고 남은 모르리라 생각하는 세상, 남은 먼저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는 세상, 그 세상의 눈이 바로 타인이다.

타인의 눈 속에서 사랑과 이해를 발견하는 일은 내가 먼저 사랑과 이해를 깨달아야 만이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 자석처럼 강하게 끌려가는 것, 다 주고 싶고, 다 가지고 싶은 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느린 걸음으로 오고, 외로움은 사치품처럼 가슴에 매달려 있고, 작은 것을 보면서 큰 것을 배우는 지혜도, 큰 것만 보고 작은 것은 묻어버리고 싶은 외면도 모두 다 타인의 눈이 먼저이다.

나보다 한 발 앞서 가는 사람들, 나보다 한 발 뒤에서 오는 사람들, 알고 보면 그들 모두가우리라는 이름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반자’이다.

인생이란 ‘무형의 존재를 위해 나아가는 길’ 밖에 갖지 못한 존재이다.

또한 현명함으로 대체된 삶의 질서도, 어리석음으로 대체된 삶의 무질서도 인생이다.

우리는 때로 남의 인생을 가볍게 이야기하기 쉽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내 잣대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남이 곧 나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곧 타인의 눈이다.

오늘도 나는 타인의 눈 속에서 나를 찾고 있다.

애써 보폭을 조율하면서 누군가에게 ‘동반자’가 되어주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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