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렬 기자) 북한산국립공원 도봉산지구 문사동 계곡 일대가 국가지정 문화재, 시도기념물 제28호로 보호 되고 있다. 최근 도봉서원 터 문화재 발굴 및 복원사업이 한창인 가운데 서울지역 사액서원으로서 본래는 고려시대의 영국사가 있던 일대이다.

시도기념물 제28호(서울시)인 서울 도봉산의 도봉서원 터의 옛 모습. 이 일대 도봉계곡의 암각자 바위 군이 모두 서울시 기념물이다.(사진=문화재청)

문화재청과 서울 도봉구가 2012년 도봉산 계곡의 조선시대 사액서원인 도봉서원의 복원을 위해 서원 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고려시대 불교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따라서 서원이 조성되기 훨씬 전에 조성된 고려시대 영국사 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려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번성했던 영국사는 어느 시점엔가 쇠락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5세기 초 터만 남은 자리에 다시 사찰이 세워졌다.

이후 조선시대 영국사는 효령대군의 후원을 받고 왕실 차원의 불교행사가 거행되는 등 번성하였으나, 성종 대에 급격히 쇠퇴하면서 16세기 중엽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도봉서원 터에 대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조선시대 건물터 다수와 석축 등이 확인되었고, 도봉서원이 영국사의 일부 건물 터와 기단을 재활용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발굴조사에서 중심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금강령과 금강저를 비롯한 다수의 국보급 고려시대 금속공예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대명왕과 범천,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까지 무려 11구의 존상이 섬세하게 표현된 금강령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유물들의 뛰어난 조형성, 예술성과 함께 이러한 유물들이 조선시대 서원 터에서 출토 되었다는 점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출토된 금속제 유물은 모두 79점으로 커다란 청동 항아리 안에 향로, 향합, 굽다리 그릇, 그릇, 숟가락 등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위를 청동 대야와 청동화로가 덮고 있었으며, 초본草本으로 다시 덮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처럼 옛 절터에서 불교 금속 공예품들이 한꺼번에 발견되는 것은 종교적 의례 행위나 전란 등으로 인해 임시로 묻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석각편(글자가 새겨진 돌조각)의 천자문도 발견됐는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천자문千字文’ 유물로 확인됐다. 또 서원 터에서 그동안 출토된 6점의 석각편 가운데 3점은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고려시대 석경(불경을 새긴 돌)으로 확인됐다.

이 석각편의 글자가 고려시대 초기(10세기)에 새긴 천자문의 일부 구절로 뒤늦게 밝혀짐으로써 우리 금석학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고 있다. 이같은 발굴로 도봉산 영국사는 천 년 만에 빛을 본 셈이다.

시도기념물 28호인 서울 도봉산 도봉계곡의 금강암 주변에 새겨진 각자 '복호동천'으로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샘[川]이란 의미이다.(사진=문화재청)

한편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도봉산 계곡의 도봉서원 터 주변과 문사동 각자 바위가 있는 문사동 계곡 일대에 대하여, 전통적 명승지와 역사유적으로서 보존가치가 크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 2009년 10월 22일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했다.

조선 중종 때 성리 학자이자 개혁 정치가인 정암 조광조가 즐겨 찾았고, 율곡 이이와 백사 이항복 등 당대에 유명한 문인, 학자들이 시나 문장으로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 도봉산 계곡과 계곡 안에 자리 잡은 ‘도봉서원’ 터, 그리고 각석군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보존된 것이다.

이 유적들은 이로써 조선 전·후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조광조와 송시열을 모시며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에 서울 지역의 수많은 인재들이 학문을 닦았던 ‘도봉서원’과 송시열, 송준길, 김수증 등 당대 명필들의 글씨가 새겨진 도봉서원 앞 계곡의 바위들이 도봉산 계곡과 함께 서울시 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서울 도봉산 도봉선원 터 앞 계곡에 위치한 '고산앙지' 각자이다. 높은 산을 우러러 본다는 뜻이지만, 학문과 덕망이 높은 선비를 높이 우러러 추앙한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도봉서원 바로 앞에 서각된 것으로 정암 조광조와 우암 송시열의 학문을 추앙하며 김수증이 썼다고 전한다.(사진=조경렬)

‘도봉서원’은 양주목사 남언경이 정암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그가 경치 감상을 위해 자주 찾던 도봉산 자락에 1573년과 1574년에 걸쳐 세운 서원으로, 1696년부터는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함께 모셨다.

그리고 수도권 내 가장 대표적인 서원이었던 만큼 역대 왕들의 관심도 각별해 영조는 ‘도봉서원’이라는 현판을 직접 써 보내 사액서원으로 존중했다. 그리고 정조는 직접 방문한 후 제문祭文을 내리고 관리를 파견해 대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도봉산 등산로를 따라 나 있는 약 0.5Km 길이의 계곡에는 도봉서원과 깊은 관련이 있고 당대에 명필로 이름을 날린 송시열과 송준길, 김수증, 한수재 권상하 등 유학자들의 글씨와 시문이 새겨진 바위들인 각석군이 있다.

서울시는 도봉서원이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당 부분과 각석군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고, 이들을 감싸고 있는 도봉산 계곡 자체가 조선시대 각종 문헌이나 시에 등장하는 전통적 경승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기념물 내에는 도봉산 입구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도봉동문’을 시작으로 금강암 앞의 ‘복호동천’ 까지 총 11개의 바위에 14개의 바위에 글씨 또는 시문이 새겨진 각석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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