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렬 기자) 서울에서 남도의 합천 해인사로 가는 길은 밤길로 시작되었다. 지난 달 30일 늦은 밤 좋은 산행 친구들과 식사를 함께하고 준비된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가야산은 필자가 오래 전부터 다시 가고 싶은 산중의 하나였다.

국립공원인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세계문화유산 8만대장경이 있기 때문이다. 밤길로 시작된 산행은 경북 성주 수륜면 백운리 법주사지 쪽에서 서성재로 오르기로 되어 있었다.

경남 합천의 가야산(사진:조경렬)

엊그제가 보름이어서 보름달에 가까운 온달이 머리 위로 떠 있었다. 누구를 비추기 위함인가. 잊지 못할 임의 앞길 밝히기 위한 그 임의 달인가. 별들은, 환한 달빛에 숨죽이고 엎드려 있는 숲 위에 소금을 뿌린 듯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빛이 이마를 적신다.

도대체 저 놈의 별은 왜 서울에는 없는 것인가. 인간의 욕심이 자연의 현상까지 망가뜨려 놓았다는 걸 알면서도 앙탈을 부려본다. 서울에서도 볼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일행들은 소소한 달빛이 숲속을 내리비추는 밤길을 천천히 그리고 그윽하게 즐기며 걷고 있다.

백운1교에서 백운3교를 지나 산릉으로 오르는 길이 나왔다. 새벽달이 나뭇잎 사이로 머리를 빠끔히 내밀며 자기도 좀 쳐다 봐 달란다. 그렇잖아도 난 달을 보며 걷고 있는 중이다. 달밤에 숲속을 걷는 것은 적적함, 고요함 그리고 그리움이다. 그 무엇에 대한 그리움.

한 시간을 걷다가 쉬어가기로 했다. 칠불봉까지는 두어 시간 이상 더 올라야한다. 날이 새기 시작했다. 먼동이 터 오고 머리 위로는 온달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8부 능선에 오르자 일출이 시작됐다. 붉은 기운이 동쪽 하늘에 차오르고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가양산 산정의 일출 풍경

온 산하가 붉은빛이다. 대자연이 붉은빛의 향연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가끔 밤길로 허걱허걱 산을 오를 때면 일출을 보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운해가 끼었어도 아름다운 운해 위로 붉은 해가 솟아올랐다. 어둡던 산정이 밝아오면서 산릉의 자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산자락 저 멀리로는 하얀 운해가 솜이불처럼 자욱하다. 아침에 야생 산양이 울어댄다. 산양 가족이 새벽부터 산책 나와 바위 위에 올라서서 음~매! 음~매! 울고 있다.

산에서 사는 저 산양도 근심걱정이 있어 우는 걸까?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 일행이 정상으로 향하고 있다. 가야산은 우두봉인 상왕봉이 정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칠불봉이 3m 더 높은 것으로 실측되었다.

오르는 길목에 날이 새지 않아 만물상과 성터를 탐방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산정에서 사방으로 내려다보이는 새벽 조망이 산상의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영암의 월출산도 그렇고, 제천 월악산도 그렇듯이 산상에서 사방으로 내려다보이는 세상풍경은 아름다움의 극치다. 

가야산 우두봉에서 내려다 본 풍경

통일신라 석조여래입상이 산상에 있다  

미리 준비된 소박한 아침을 우두봉 바로 아래 안부에서 산우山友들과 함께했다. 한여름인데도 산정의 아침은 쌀쌀하다.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우리는 해인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하산을 서둘렀다. 하산 길에 천년의 세월을 보낸 석조여래입상을 친견하기로 했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은 상왕봉 정상 아래 약 1km 지점 등산로 옆에 자그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위치에 숨어 있다. 보물 제246호인 이 여래상은 목 부분이 잘리고 발과 대좌가 없어진 게 흠이다. 양팔을 몸에 붙이고 반듯하게 선 자세로 얼굴은 둥글고 코와 입이 작게 조각되었다.

얼굴과 신체의 양감, 옷 주름이 통일신라의 불상인 듯 한 인상을 받지만 자연스럽지 못하고 경직된 자세와 입체감이 덜한 평면적인 조각에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짐작되고 있다. 이런 산정에 여래상이 조각되어 천년의 세월 동안 풍진風塵에 견뎌온 것만으로도 대견하고 우리 조상들의 예술 혼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다.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으로 상왕봉 정상 아래 1Km 지점에 위치 하고 있어 일부러 찾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문화재이다

가야산은 해인사가 있어 더 유명하다. 해인사는 불교 조계종의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불법승佛法僧 3보 사찰의 하나인 법보사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문화유산 8만대장경과 경전이 보존된 대장경 판전이 있고 암자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현대의 큰스님 성철종사가 기거했던 백련암을 비롯하여 홍제암, 원당암, 금선암, 삼선암, 보현암, 약수암, 지족암 등이 해인사 계곡의 천년 숲속을 빼곡히 메우고 있다. 대웅전 뒤편 20여개 계단 위 팔만대장경 현판이 붙은 문으로 들어서면 750여년의 장구한 세월에도 원형대로 보존되어 내려오는 팔만대장경 목판본이 판전에 실려 있다.

고려 장인의 숨결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목판.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수없는 외적의 침략과 동란에도 이렇게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감사함에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그래서 대장경과 장경판전은 세계문화유산이다. 선조들의 숨결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것 같아 대웅전 옆 뜰에 앉아 한참 동안 상념想念에 젖는다.

바로 이 팔만대장경은 인쇄술 역사에서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본과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인쇄 문화의 종주국이다.

허나 참으로 아쉬운 것은 우리 조상들은 경전의 인쇄와 보급에 힘을 쏟았을 뿐 이 인쇄술을 출판 보급으로 일찍이 문서나 서책 유통의 일반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서양의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을 앞서고도 뒤진 것처럼 세계사에 알려진 이유이다.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사찰로 알려진 해인사

6·25때, 팔만대장경 폭파 위기극복…김영환 장군

민족의 긍지 세계유산 팔만대장경이 지금까지 있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김영한 장군’이다. 해인사 초입은 여느 사찰보다 소박하고 경건함이 묻어 있다. 소나무 숲과 원시림에 가까운 상림은 법보사찰로서 위엄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케 한다.

내력을 모르다면 생뚱맞다 할지 몰라도 동구를 지나면 부도밭 한 켠에 김영환 장군의 해인사공적비가 있다. 팔만대장경도 숭례문처럼 아픈 과거로 남을 뻔 했던 사건이 6·25 사변 기간에 있었다. 그 위기의 순간을 패기와 지혜로 넘긴 위대한 영웅이 있었다. 바로 김영환 장군이다.

그의 공적비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로 시작되는 내용은 이렇다.

1951년 12월 18일 6·25 전쟁 당시 미군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4기의 공군 편대에 명령을 내렸는데 이 편대장이 당시 31세의 김영환 대령이었다. 이 전투기에는 네이팜탄과 로케트탄을 싣고 있어 네이팜탄 하나면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은 잿더미로 변해 버릴 위기였다.

당시 김영환 대령의 모습으로 훗날 그의 업적을 인정해 장군에 추서되었다.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당시 가야산 일대에 있던 인민군 병사 500여명과 유격대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함인데 전시작전권 없는 국군으로서는 미군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전시즉결 처분을 받을 수 있어,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항명이었다.

그 명령을 거부하고 해인사와 대장경을 지킨 영웅이 김영환 장군이다. 명령 불복종죄로 미군 작전사령부에 불려간 장군은 다음과 같이 소명했다.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로 영국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해인사 팔만대장경과는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김영환 대령의 조국애에 대한 깊은 철학이 담긴 해명이었다.

그의 이와 같은 당당한 패기와 재치 있는 항변에 미군도 이해하고 무마한 사건이었다. 이 사실을 고증한 조계종과 해인사는 그의 숭고한 우리 문화재 사랑 정신에 공적비를 세워 길이 후손에 공경을 표하고 있다. 장군의 아름다운 뜻이 영원히 살아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해인사 숲 터널을 걷는다.

한여름 해인사 숲은 고요와 정적 속에 폭서暴暑를 피해 고즈넉이 엎드려 있다. 산행을 마친 산행 팀은 해인사를 빠져 나와 해인천에 발을 담그고 잠시 탁족濯足의 여백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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