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훈원장
(마음나눔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동국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광주광역시 교육청 스쿨닥터)

“저는 모릅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청문회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뻔한 변명들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거짓말인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가끔 살아가면서 인생에 꽤 크고 강력한 경험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이나 사고, 범죄 등과 같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겪은 당사자들이 정작 하나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럼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요? 우리의 마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외적, 내적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의식적인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심리학적 용어로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방어기제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정신과정으로 누구나 사용하고 있지만 그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적이어서 스스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어떤 유형의 방어기제를 사용하느냐는 그 사람의 정신 건강이나 성격과 유의미한 관계를 보이는데, 특정 방어 기제를 지나치게 사용하는 것은 정신 병리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는 방어기제를 이용하여 현재 처한 괴로운 상황들에서 발생하는 불안을 감소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본능적 욕구를 부분적으로나마 충족시키게 됩니다. 따라서 방어 기제의 적절한 사용은 일상에 적응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방어 기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앞서 말한 경우는 가장 흔히 사용되는 ‘억압’이라는 방어 기제의 예가 됩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들을 의식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무의식에 머물게 해서 결과적으로는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 다른 원초적인 방어 기제 가운데 ‘부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불치병을 진단 받은 환자는 초기에 자신의 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이라는 방식으로 방어하게 됩니다. 이러한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제대로 된 치료로 이어질 수가 없게 되지요. ‘투사’라는 방어 기제도 있습니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나 욕망 등을 자신이 아닌 타인이나 외부 환경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패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투사의 흔한 예입니다. 비슷하지만 다른 ‘합리화’라는 방어 기제도 있습니다. 무의식적 동기에서 일어난 행동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럴듯하게 의식적인 이유를 내세우는 방법입니다.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는 대표적이 합리화의 예입니다. 대소변을 잘 가리던 아이가 동생이 태어나자 오줌을 싸게 되는 ‘퇴행’이나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긴다.’는 속담 같은 ‘전치’의 방어 기제들도 있습니다.

본능적 욕구나 참아내기 어려운 충동 에너지를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형태로 돌려 쓰는 방어 기제를 ‘승화’라고 합니다. 청소년 시기의 왕성한 성적, 공격적인 에너지를 격렬한 춤이나 운동으로 표현하는 것, 잔인하고 공격적인 본능을 외과 의사가 되는 것으로 푸는 것 등이 승화의 좋은 예가 됩니다. ‘승화’와 더불어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로 나타나는 ‘이타주의’나 자신의 불쾌한 감정을 타인들로 하여금 웃음을 유발하는 즐거운 과정으로 대체하는 ‘유머’와 같은 건설적이고 건강한 방어 기제들도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방어 기제는 무의식적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서 스스로 알아채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가끔씩 내가 어떤 방어 기제를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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