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목기자)  현재 김천시에서는 잊혀진 감문국의 역사를 재조명하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서기 1세기 경, 삼한시대로 구분되는 한반도 중남부 지방에는 무려 78개국이 마한, 진한, 변한의 소국으로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변한계의 12개 소국 중 하나가 바로 감문국(甘文國)이다. 비록 서기 231년, 신라의 전신인 경주 사로국 대장군 석우로에 의해 멸망하였으나 개령면 동부리 감천변을 중심으로 성립돼 수백 년 동안 이 지방을 다스렸던 감문국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로부터 무려 18세기가 지난 후 2018년 1월 26일에는 김천시 개령면에서 ‘감문국 이야기나라 조성사업’기공식이 개최되었다. 민선 6기 공약사업으로 추진한 감문국이야기나라 조성사업은 총 사업비 156억원(국비 68억, 도비 10억, 시비 77억)을 투자하여 개령면 동부리 일원 20,120㎡부지에 역사문화전시관을 중심으로 각종 역사테마 체험시설을 조성하고, 감문면 삼성리에 위치한 금효왕릉을 정비하게 된다.

시에서는 지난 2014년부터 백두대간권 종합계획결정고시를 시작으로 주민설명회와 설계자문위원회를 거쳐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왔다. 이번 사업은 2019년 준공예정으로 59번국도 및 3번국도의 뛰어난 접근성을 바탕으로 김천의 역사를 알리는데 일조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감문국-소설-왕의길

 

또한, 감문국을 소재로 한 소설 ‘왕의 길’이 책으로 출간되어 전국 서점에서 시판 될 예정이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장편소설 ‘왕의 길’은 소설 ‘아버지’로 유명한 김정현 작가의 신작으로 우리나라 삼한시대 변한의 소국이던 감문국이 뜻을 채 펼치기 전 진한의 사로국에 편입되는 과정을 빗내농악, 동부연지, 장군샘, 금효왕, 장부인, 원룡장군 등 다양한 소재와 인물에 작가의 풍부한 소설적 상상력을 더하여 흥미롭게 소설로 담아냈다.

시에서는 ‘왕의 길’ 출간에 맞춰 향 후 김정현 작가를 초청하여 그의 작품 설명과 창작활동을 주제로 ‘작가와 만남의 날’을 계획하고 있고, ‘왕의 길’을 전국 공공도서관과 관내 유관기관에 배포하여 감문국 홍보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감문국은 어떻게 성장한 후, 무엇에 의하여 멸망하였을까. 각종 역사서 및 문헌, 유적을 바탕으로 감문국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 감문국의 흥망성쇠(興亡盛衰)

감문국은 기원전후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많은 읍락 국가 중 하나다. 감문국의 건국 주체는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에 걸쳐 감천 유역에 산발적으로 집거(集居)하던 토착민들로서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의 전환기 무렵 감천 중하류인 개령·감문 일대로 이동해 주변의 읍락을 통합, 흡수해 형성한 읍락 국가로 볼 수 있다. 감문국은 감천의 중하류에 위치하여 비옥한 충적 평야를 기반으로 기원전후 1세기경 성립, 정치적 성장을 꾀했으나 사로국, 즉 신라에 의해 결국 정복되고 말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사절요’에는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진한 12국의 하나인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차례로 복속하여 일찍이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후 영역 확장을 꾀하는 과정에서 낙동강 서편의 변한 12국을 공략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감문국이 위치한 김천 지역이 영남 내륙의 교통 요지이자 한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거점에 해당되어 일찍부터 신라의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감문국은 주조마국과 함께 고령·성주 등과 인접해 있어 일찍부터 가야 제국들과 친교하며 문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친가야 정책을 견지했다. 신라의 감문국 복속은 1차적으로는 친가야·친백제로 기울던 상주의 사벌국(沙伐國)과 감천을 경계로 역시 가야와의 유대를 긴밀히 해 온 감문국·주조마국의 연결 고리를 끊어 변한계 소국들과 가야·백제의 결속을 약화시키려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는 감문국을 복속한 이후부터 8세기 중엽까지 감문군(甘文郡)-감문주(甘文州)-개령군(開寧郡) 등으로 개편하면서 김천 지역을 정치, 군사적 거점으로 삼게된다.

◆ 역사서로 보는 감문국

우리나라 역사서에 감문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로, 신라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2년 7월 조에 “신라가 이찬 석우로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토멸하고 그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고 기록된 이래 모든 사료에 감문으로 등장하고 있다. 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제3권 신해년(辛亥年) 신라 조분왕(助賁王) 조에도 위와 유사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가을 7월 신라에서 이찬(伊湌) 석우로(昔于老)를 대장으로 삼아 감문국을 쳐서 깨뜨리고 그 땅은 군(郡)으로 삼았다. 우로(于老)는 내해왕(柰解王)의 아들이었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사절요’ 이래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고지도와 지리지, 향지 등의 사료에는 감문국이 등장하고 있다.

1895년에 발간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와 1933년의 ‘교남지(嶠南誌)’, 1929년의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1934년의 ‘감문국개령지(甘文國開寧誌)’에도 예외 없이 김천의 연혁과 관련해 ‘감문소국신라취지(甘文小國新羅取之)’라 하여, 김천 지역이 원래 ‘감문’이란 작은 나라였는데 신라에 의해 폐합되었다는 기록이 공통으로 등장한다. 조선 후기 인문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관련 사료를 종합해 볼 때 감문국의 중심지는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일대로 추정된다.


◆ 감문국의 흔적들

고인돌

 

1990년 공단 부지 조성 과정에서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 변에 위치한 구성면 송죽리 일대에 신석기와 청동기, 철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층위적(層位的)으로 형성된 취락 구조가 발견되면서 감천의 중하류에 위치했던 감문국과의 관련설이 나오기도 했었다. 또한, 구성면 송죽리 감천 변에서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주거지 및 유물이 대량 출토되고, 같은 감천 유역인 개령면과 감문면 일대에서 동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인 고인돌이 집단으로 발견된 적도 있었다.

▲ 산성유적

속문산성

 

감문국과 관련된 대부분의 유적은 파괴되고 멸실되었는데 일부 남아 있는 산성 유적 중 감문산성(甘文山城)은 높이 239m의 감문산 정상부에 축조된 산성으로, 유사시 피난처 및 지휘소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감문산 정상부에는 능선을 따라 인위적으로 축조된 흔적이 뚜렷한 토성(土城)이 길이 200m, 높이 2.5m, 폭 10m 남짓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중앙부의 흙을 파내 정상으로부터 바깥쪽으로 급경사가 되도록 쌓고 중심부를 평평하게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 궁궐터

각 문헌마다 공통적으로 유산 북쪽과 동원(東院) 옆이 궁궐 터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유산은 현재의 유동산(柳東山)을 가리킨다. 관용 숙소였던 동원은 동부리에서 양천리로 넘어가는 역마고개 인근에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역마고개 일대가 궁궐의 중심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1960년대 말까지 양천리 487번지 마당에 감문국 시대의 궁궐 초석이라고 전해지는 가공한 석재들이 몇 기 남아 있었던 것으로 전하며, 현재도 대문 앞에 일부가 돌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금효왕릉(金孝王陵)

금효왕릉은 감문국 시대 왕릉으로 전해지는 고분으로 궁궐 터에서 감문산을 넘어 북쪽으로 8㎞ 떨어진 현 감문면 삼성리 오성마을 930번지 밭 가운데 봉분 높이 6m, 지름 15m 크기로 남아 있는데, 김천 지역에서는 가장 큰 고분이다.

금효왕릉의 규모는 현재보다 큰 규모였다고 하나 오랜 세월 경작지로 잠식되어 전체적인 규모가 축소되었고, 일제 강점기 수차례 도굴되어 부장품의 존재 여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의미 없이 말무덤으로 불려 왔는데, 여기서‘말’은‘크다’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로 봐야 하므로 말무덤은 큰무덤, 곧 수장(首將)의 무덤으로 봐야 할 것이다.


▲ 장릉

장릉(獐陵)은 개령면 서부리 웅현(熊峴) 도로 변의 옛 사자사(獅子寺) 터 옆에 있으나, 지금은 경작지로 개간되어 정확한 봉분의 형체를 분별할 수 없다. 향지 곳곳에 기록이 등장하는 장릉은, 구전으로 감문국 시대의 어느 왕비 무덤으로 알려져 왔으나, 금효왕 어머니의 능(陵)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 동부연당(東部蓮堂)

동부연당

 

1934년에 우준식(禹雋植)이 편찬한 ‘감문국개령지(甘文國開寧誌)’에서 동부연당이 삼한시대 소국인 감문국의 궁궐에 딸린 연못이라 했다. 관련 사료와 구전을 통해 볼 때 감문산을 배후 산성으로 하고 개령면 동부리 관학산과 유동산 사이에 궁궐을 세우면서 감천과 인접해 입수와 배수가 용이한 이곳에 궁지(宮池)로서 동부연당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동부연당은 유동산을 중심으로 감천제방으로부터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앞까지 길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대폭 축소되었고 2009년 보물찾기를 통한 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연못 주변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동부연당 주변에는 버드나무 수 그루가 자생하고 있어 고풍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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