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취재본부장 조대형

興盡悲來(흥진비래), 이른바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는 뜻으로, 세상일을 순환되는 것임을 일컫는 말이다.

역사는 승자독식의 수사적 장치다. 역사는 가장 좋은 스승(最好的老師)이다. 역사는 한 국가의 지나온 발자취를 충실히 기록하고, 미래의 발전을 제시해 준다. 하지만 언어가 역사에 기대면 달라진다. 함축과 격조가 생겨난다. 때로는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린다.

작금의 한국적 현실은 이른바 언어 수사가 만들어 낸 졸작들이 득실대면서 나라의 앞날을 혼론케 한다.

문재인 정권 출범이후 즐거운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사람의 눈물과 고통, 비애를 요구한 결과물이었다.

남북정상회담 또한 반드시 슬픈 일이 도래하고 말 것이라는 북한의 과거 형태를 반면하지 못한 채, 오직 포플리즘적 시각을 우위에 두고 친북적 사고를 더하여 즐거운 일을 도모한 것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북한과 미국과의 대화에도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을 요구되지 않을 듯 싶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 한국의 즐거운 기간을 오래도록 지속시키려 하지 않고 있다.

미북 대화의 지렛대 역할을 한국 측에 주지 않으려는 심사들이 곳곳에서 노출되고 있다.

미국과의 대화를 위해 활용한 한국의 역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식의 노골함도 드러내고 있다.

노동신문은 이날 '민족자주의 길에 빛나는 불멸의 업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지금 조국통일운동은 내외반통일세력의 악랄한 책동을 짓부시며 민족자주의 기치에 따라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며 "북과 남, 해외의 각계각층 동포들은 조국통일운동의 자주적대를 확고히 세우고 외세의 간섭과 방해 책동을 단호히 물리치며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애국위업을 더욱 활력 있게 추동해나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여론을 기만하기 위한 악랄한 모략책동'이라는 사설에서 미국을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남조선당국은 여성종업원을 돌려보내라'는 사설에서 현 문재인정권과 과거 박근혜 정부를 분리해 비판했다.

북한의 이같은 메시지 흐름은 한미정상회담·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과 미국에 대해 일시적으로 긴장을 올리면서도 현재의 판을 뒤엎지 않으려는 수로 보인다.

또,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 자본주의 체제에도 인권 문제가 있음을 알리며 대내적으로 체제 우위를 강조하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한국 측 기자단에 대한 접수를 끝내 받지 않으면서도 비판의 대상을 자유한국당과 홍준표 대표 등 보수 세력에 집중해 현재 조성하는 긴장의 원인을 문재인 정부가 아닌 남측의 다른 세력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신문은 22일 자유한국당을 비판하면서 "한 줌도 못 되는 반통일 역적들이 아무리 발광해도 대세의 흐름을 돌려세울 수 없고 북남관계 개선과 통일에로 향한 민족의 지향과 요구를 꺾을 수 없다"며 현재 진행 중인 회담의 흐름에 큰 문제가 없음을 시사했다.

불쾌하고 불길하다. 다수 한국인에겐 의심과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북한은 한국에 대한 친밀감을 거두어버렸다. 우리 정부는 내막을 제대로 추적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에는 비겁함이 깔렸다. 대부분의 시민단체도 침묵했다. 아베·트럼프가 그런 식의 발언과 행동을 했다면 어땠을까. 미·일 대사관 앞은 시민단체 촛불로 넘쳤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 그 발언이 동북아 질서 재편의 전환기적 성격을 담고 있어서다.

한국은 북한 김정은과 중국의 늪에 빠졌다. 한국 외교의 평판은 망가졌다. 홍콩 신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은 한국의 사드 문제에서 총 한 발 쏘지 않고(without firing a shot) 이겼다”고 했다. 한국은 중국과 친근해야 한다. 하지만 당당한 우호여야 한다. 그래야 국제사회에서 대접받는다. 그것이 한국 외교의 도전 과제다.

환상의 남북정상회담을 두고 “민족정신의 부활”이라며 자화자찬에 열을 올리는 지배정권과 진보식자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당신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남북신뢰’란 과연 실재(實在)하는가? 미국을 보다 더한 동맹을 다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특히 국제관계에서의 동맹은 ‘여러 국가들이 힘을 모아 공동보조를 취하기 위한 국제정치 상의 제휴관계’로 이해된다. 히틀러 독일에 맞선 미국과 유럽국가들의 동맹,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동맹의 사전적 정의에서 공통되는 것은 ‘동일 행동’이란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동맹을 맺은 쌍방이, 주고받는 (give and take) 관계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

제3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동맹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로 ‘서로’ 약속한다는 게다. 한미동맹은 과연 ‘동일 행동’을 주고받는 관계일까. 만일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의 공격을 받기라도 한다면 북한은 한국을 군사적으로 원조할 수 있을까.

또한 동맹은 현존하는 적이나 잠재적 적성국가에 힘을 합쳐 대항한다는 목적 즉, ‘집단적 안전보장’을 추구한다. 국가간 동맹의 궁극적인 목적은 평화 보장에 있다는 것이다. 평화 유지를 통한 안보가 동맹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인 데 비해 동맹국 각자가 이익은 하위목적이 된다.

우리는 지금 통일과 안보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다. 통일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떠한 과정을 거치는 통일이며,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 통일인가도 중요하다.

안보 역시 조금도 방심 할 수 없는 현실적인 과제다. 안보는 결코 북한만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통일조국은 더욱 강대한 주변국을 갖게 되고, 그 주변국들과는 모두 영토에 대한 분쟁거리도 있다. 최소한 우리의 생존과 자존을 지킬 수 있는 국력은 필수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통일과 안보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의 역할과 중요성을 이해하고 이를 균형 있게 발전 시켜야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북한이라는 존재는 가장 가까이 해야할 피를 나눈 한 민족 한 형제이면서도, 현실적으로 경계해야하는 또 하나의 적이 되는 이중적인 관계를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슬픈 자화상이며, 현실이다. 즐거운 일이 채가시기도 전에 슬픈 일이 도래하는 일은 더 이상 만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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