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曹操)의 용인술(用人術)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했다 (10)

가후(賈詡=147~223)는 자가 문화(文和)이다. 위(魏)의 대신으로 무위(武威)군에서도 변방인 고장현(姑臧縣)에서 태어났다. 출신 성분이 명문거족이 아니었기에 젊은 시절에는 주변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가후는 동탁(董卓)의 참모를 거쳐 이각, 각사의 군사를 맡아 한수와 마등의 근왕병을 물리치고 이각과 곽사를 도와 장안을 회복한다. 그는 이각과 곽사를 설득하여 황제와 대신들을 보호했다. 이때 이각과 곽사가 서로 권력투쟁으로 싸우게 되자, 가후가 중재를 맡게 된다. 이각과 곽사가 실각하자 그는 장수(張繡)의 막하에 있으면서 장수와 유표(劉表)를 도와 신출귀몰한 병법으로 조조군을 대파했다.

조조는 장수를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기세 좋게 출전하지만 가후의 계략에 말려들어 자신의 아들인 조안민, 조카 조앙 그리고 아끼던 장수 전위까지 목숨을 잃게 되고, 조조 자신도 목숨을 잃을 번한 지경에 떨어졌다가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만 부지하는 참패를 당했다. 조조에게는 장수와 그의 참모 가후도 철천지원수가 되고 만 것이다.

그 후 그는 장수를 설득 함께 조조에게 귀순한다. 조조의 휘하에서 그는 순욱과 더불어 관도 대전의 승리에 기여했고, 적벽대전을 하려는 조조를 만류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조조군은 적벽에서 대패한다. 이로 인해 중국의 통일은 70여년 후에야 이루어진다.

이후 그는 조조의 가장 큰 우환인 마초와 한수의 연합군을 이간계(離間計)로 물리치고 장로를 공격할 때 큰 공을 세워 방덕을 조조의 휘하로 끌어드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조조가 후계자 문제로 고민하자 원소의 예를 들어서 장자인 조비에게 물려주도록 권하여 이를 성사시킨다. 이로써 그는 조비의 후견인이 자연스럽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용인의 대가인 조조가 가후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사에 따르면 조조는 가후가 귀순한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기뻐하면서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나의 신의가 천하에 중요하게 된 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군요.”라 하였고 즉시 그를 도정후(都亭侯)에 봉하고 기주목(冀州牧)에 임명한다.

조비(문제)가 즉위하자 가후를 태위로 삼는다. 태위란 최고위직 삼공(三公)의 하나로 국방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데 대개 대장군이 겸임했던 자리다. 조비는 가후의 맏아들인 가목(賈穆)을 부마도위로 삼았고 둘째 아들 가방(賈訪)을 열후로 삼았다. 조조가 남겨준 중요한 모신들 가운데, 가후는 자리가 가장 높았고 그 결말도 가장 좋았던 사람이다.

가후는 자신에 대해 매우 엄격 했으며 청렴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여러 가지의 벼슬을 주려고 해도 사양했다. 예를 들면 이각과 곽사가 가후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제후로 봉하려 하자 사양하였고 상서복야(尙書僕射)를 제수하자, “상서복야란 모든 관리의 우두머리이며,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 받드는 직책인데 저는 다른 사람을 설복 시킬 수 없을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가후는 워낙 탁월한 식견과 학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항상 경계하면서 살얼음판을 걷듯이 살아간 것으로 보인다. 말썽이 나는 것을 꺼려하여 사사로이 어떤 교분도 맺지 않았고 항상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지켰으며, 권문세족과 혼인관계도 맺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주류사회에 얼마나 적응하기 힘들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리라.

이처럼 가후는 상황 판단과 정세를 분석하는 능력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가후의 가장 큰 장점은 그의 능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절개를 지키고 신의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곧은 선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점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물처럼 바람처럼 유연하게 자신의 생각을 변화하는 융통성에서 뛰어난 처신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나설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공을 다투는 논공행상에 나서지 않았고 위로는 순응하고 옆으로 시기와 질투를 경계해 사사로이 인맥을 형성하는 등 쓸데없는 세를 절대로 과시하지 않았다. 부를 축적하거나 명예에 집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강하고 큰 목소리를 내거나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두고 남자답다. 혹은 선비의 자세다. 그리고 자존감의 표현이라고 일컫지만, 그는 바로 이 같은 행동이야 말로 쓸데없는 만용과 자존심이라 생각했다. 조조의 논리와 뜻이 일치를 이룰 때는 그것이 비록 우회적인 길일지라도 급하게 물길을 바꾸려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다. 바로 이 같은 그의 처세가 조조와 조비 휘하의 1백여 명의 참모 중에서 77세까지 장수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닌가 한다.

가후는 충성심과 절개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그는 자신이 누군가의 신하로 있는 순간에는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다. 동탁의 경우는 직접 그의 휘하에서 지휘를 받는 것도 아니었고, 이각과 곽사는 오히려 가후의 능력 자체를 버거워 해 그를 부하로 삼을 수 있는 그릇이 못되었다. 단외나 장수역시 마찬가지이고 조조만이 가후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부릴 수 있는 상관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가후를 배신과 변절의 일생을 보낸 것처럼 바라보고 그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순전히 후대 사가들의 개인적인 호불호에 의해 쓴 곡필무사(曲筆誣史)라 아니할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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