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삼의 초대시

 

겨울 산

가슴으로 입는 겨울,

눈물 묻어날 듯한

애잔스럼 과 슬픔 사이로

보고픔의 강 흐르고,

멀리서 들리어나는

두견새 소리에

떠남의 여울

파도되어져 실려들면,

 

시작되는 밤을 위하여

달은 또 다시 떠오르며,

 

깊어진 시름마냥 등잔불

속절 몰라 깜빡이면

추워서

추워서

성큼 다가온 겨울

산 턱만 저리 키우나.

 

시의 창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평창올림픽’의 성화가 연일 화려하고 우람하게 타오르고 있다.

지축을 뒤흔드는 함성과 박수소리가 지구촌에 울려퍼진다.

비록 매서운 바람을 몰고 온 한파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이 때이지만, 젊은이들의 열기와 기상이 뒤덮은 강추위도 모두 녹여버릴 기세다.

물론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경연의 집대성이지만, 올림픽의 근본 이념은 ‘평화’와 ‘사랑’이라는 본질을 곱씹으며 묵묵히 새벽의 겨울 산을 오르다가, 과연 모든 세상 이치를 극명하게 양쪽으로만 나누는 게 마땅한 고금의 진리일까를 곰곰 생각해 본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국제적으로 연일 계속되는 분쟁과 혼란,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심지어는 가정 안에서까지 자행되는 끊임없는 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면서, 고통 가운데 시달리고 있는 것이 사실적인 삶의 모습이다.

이러한 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평화’일 것이다.

기독교의 ‘샬롬’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화평’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겠으며, 즉 ‘평안’과 ‘안정’이라고 옮겨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화해는 반드시 어느 한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인데, 대립하고 있는 양쪽의 입장 중에서 누가 먼저 화해를 청해야 할까?

상식적으로는 상처를 입힌 사람이나 집단이 상처받은 쪽의 사람이나 집단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청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경우에 상처를 입었던 측에서 기다리지 않고 먼저 화해를 청하게 된다면, 복수나 원망의 행위 대신에 화평의 손을 내민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가뜩이나 아프고 분할 판인데 어찌 참아내며 대관절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런 시도를 할 수가 있을까?

우선 승패를 떠나서 무엇보다도 상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중세 유럽 ‘아씨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일찍이 “우리 안에 ’이해의 샘‘이 마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용서하지 못할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해의 샘이 마르지 않은 사람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상대의 잘못들을 모두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해의 샘이 마르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결과를 보면, 잘못했던 경우가 완벽했던 경우보다 훨씬 많다는 걸 우선 기억하면 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도 모르는 새에 나의 자존심이나 명분만 앞세우다가 남을 무시하거나 배척할 가능성이 생각보다 많다는 말이다.

살면서 과연 실수 한 번 하지 않았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입장과 나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매사에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게 되면 아무래도 섣부른 실수나 과오는 반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을 진실로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해의 샘이 마르지 않게 된다.

이해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그리고 설령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조차도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수 있는 화평의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다음으로 이웃에 대한 희생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 위치나 조건이 어떻든 간에 이웃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희생이라는 것이 어떤 거대한 언행이나 족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비단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일에서라도 자신이 먼저 나서서 짐을 질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는 데에서 희생은 시작될 수 있다.

그렇게 작은 희생의 마음들이 쌓여서 큰 보람이나 창대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화평의 원동력이 되어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은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하며, 항상 내가 가장 낮은 자리에 내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있으면 이 세상에 분란은 사라지게 될 것으로 여겨진다.

바라기에는 마음이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이들이 있다면, 설령 내가 억울하게 당한 것이고, 미처 내가 받은 상처가 회복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이해의 마음으로, 희생의 마음으로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희망찬 화합의 시절이 될 것이며 이 지구촌은 또 얼마나 훈훈하고 평화로워질 수 있을까 ?

무릇 변치 않는 대자연의 모습으로 겨울 산이 우리에게 제언한다.

올림픽이 끝나더라도, 그래서 평화의 상징인 성화가 꺼지더라도, 그래서 모두가 각자의 누리로 복귀한 이후에도 우리가 어찌 살아야 할 지를 알려주고 섰다.

“서로 이해하고 희생하면서 평화스럽게들 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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