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森의 招待詩

차마 못한 말

사랑한다는 말은
수도 없이 하면서
왠지 목 잠겨 지금껏 망설이다
차마 못한 말,

내 곤한 삶 속에 빛으로서,
위안으로서,
다감하게 더불어 온
당신의 빈(貧)한 자리

치유되지 않는 무수한 상흔
가슴에 그냥 묻고
긴 긴 세월 눈물 삭여온,
그윽한 눈길 마주쳐 보다가
이내 말문 막히어
아직도 못한 그 한마디

고맙소, 당신 -

 

 -시(詩)의 창(窓)

간간이 신혼부부의 결혼식 주례를 섰던 적이 있다.

연륜으로나 경력으로나 일천한 처지에 불과하여 감히 젊은이들 인생 최고의 중대사인 결혼식에 주례의 역할로 나서는 것이 내심 망설여지기도 하였지만, 이런저런 인연으로 엮여있는 인간관계가 오묘하여 종내 거절치 못하고 응했던 듯하다.

오랜 기간을 강단이나 교단에서 언어의 조화로 삶의 축을 담당하고 역할을 수행해온 필자로서는, 잠깐 동안의 주례사가 특별나게 어려운 숙제는 아닐 성 싶기도 하였지만 평생을 살아가는 데에 좌우명이 되고 지침이 될 만한 내용으로 짧게 주례사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강박감에, 결혼식 전날에는 침이 말라 다소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다.

그런 필자가 주례사를 할 때면 어김없이 신중하게 끄집어내는 말머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신혼부부에게만 필요한 말이 아닐 것으로 사료되어 인용한다.

우리가 부부 사이에 서로 표현하는 호칭 중에 ‘여보(如寶)’라는 표현이 있는데, 한자로 풀이하면 ‘같을 여(如)’자와 ‘보배 보(寶)’자이며 이는 ‘보배와 같이 소중하고 귀중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 하는 말이지, 여자가 남자를 보고 부를 때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남자를 보배 같다고 표현한다면 좀 이상스럽지 않겠는가 하는 의미이다.

그리고 ‘당신(當身)’이라는 말은 ‘마땅할 당(當)’자와 ‘몸 신(身)’자. 즉 ‘따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바로 내 몸과 같다’는 의미이니 곧 ‘당신’이란 뜻이며, 이는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 하는 말이다.

당신이 나의 삶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지금은 ‘여보’나 ‘당신’이 뒤죽박죽이 되었고, 보배와 같이 생각하지도 않고, 내 몸 처럼 여기지도 않으면서 ‘여보’와 ‘당신’을 사용하는가 하면, 높이려고 하는 소리인지 낮추려는 소리인지도 모르는 채, 남자와 여자가 뒤바꾸어져 필요에 따라서 분별도 없이 아무렇게나 쓰고 있다.

사실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소리인데도 그냥 진중하지 않게 사용한다.

그래서 혼인을 하는 신혼부부는 그 소중한 의미를 새기며,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가운데 ‘여보’와 ‘당신’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백년을 해로하는 부부가 되기를 바라는 뜻이기에, 주례사의 단골 내용으로 애용하곤 했던 것이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가족, 사회,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의 가장 기본적이며 중심이 되는 세포 단위가 바로 부부이다.

가부장적인 제도가 성행하던 우리 나라의 예전 유교적인 관습 하에서나, 지금도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는 종교가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는 나라의 경우에서나, 일찍부터 모계 혈통으로 이어져오는 아마조네스의 전설 속에서나, 현대 사회의 상징적인 트렌드로 불릴 남녀 평등과 여성 상위가 정착화된 현실적인 상황에서나, 모든 여건과 특징을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는 부부관계의 성립에서 시작되었고, 부부관계에 의해서 발전적으로 연결되어 온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진리이며 불멸의 전통이다.

아무리 문화가 발달하고 새로운 과학문명이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며 삶의 모습을 완전하게 변화시켜 놓는다 하더라도, 가정의 최우선 적인 주축을 형성하는 부부관계의 존속은 멈추게 할 수도 없고, 물론 바꾸어놓을 수도 없다.

문화나 문명 이전에 천륜의 인연을 창조하는 영원한 기초 작업이며 시작의 의미가 부부 사이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절대적이며 원초적인 부부 사이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예나 지금이나 그치질 않는 다툼이 있고, 틈만 나면 오해와 의심과 지적이 끼어들어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분란과 불화가 이어진다.

안타깝게도 부부 사이의 싸움은, 다른 사람으로서는 어느 누구도 근본적으로 말리거나 종료시킬 수도, 또는 중단시킬 수도 없는 치열하고 끈질긴 분쟁이다.

그저 남들은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막연하게 멈추기를 기다려야 하는 답답한 노릇이다.

오죽하면 인류의 투쟁 중에서 가장 오래 이어져 긴 역사를 자랑하는 투쟁이 바로 부부싸움이라고 말하겠는가 ?

허긴 잘 싸우는 부부가 잘 산다는 말이 있기는 하다.
세상에 완벽한 아내나 남편이 과연 존재할까 ?
살다 보면 때로는 바람도 불고, 비도 오고 하는 궂은 날씨와 정히 다를 바 없는 사건이나 일에 직면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을 것이다.

인생의 굴곡은 원한다고 해서 찾아오고 바라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은 완벽한 결혼 생활도, 완벽한 가족도 없다.
또한 상처 없는 영혼이 없듯이 상처 없는 가족도 없다.
한 마디로 가족 간에는 ‘최대의 이해와 최소의 상처’의 원칙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표현하자면, 가족 간에는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며 화합하기 위한 노력이 밑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요지는 누구나 다 행복하게 잘 살아가자는 말이다.

모쪼록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장식해나가려는 다짐으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출발하는 오늘부터의 삶이, 나 보다는 배우자를 더 배려하는 겸양과 이해의 마음을 가득 담고, 진실된 미래를 향하는 축복의 삶으로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밝고 따스한 빛으로 기억되며, 모범이 되고 지표가 되어지는 우리의 가정을 만드는 데 주역이 되고, 나아가서는 진정한 의미의 호칭인 ‘여보’와 ‘당신’으로 거듭나는 부부들이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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