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랑 국장

 인재(人材)를 옆에 두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제갈량의 용인술(하)

장점은 살려주고 단점을 피하는 것, 이것은 인재활용의 중요한 비결이다. 역사서를 보면 마속(馬謖)은 실제로 전투를 지휘하는 것보다 참모 역할에서 장점을 발휘했다. 제갈량은 그의 지략을 높이 평가했다. 어떤 때는 단둘이 이야기하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서기 225년, 제갈량은 대군을 일으켜 남만 정벌에 나섰다. 그는 마속의 건의를 채택하여 맹획(盟獲)을 칠금(七擒-일곱 번 사로잡음) 후 남서 지역을 평정했다. 사실 마속의 결점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유비였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제갈량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마속은 과장이 심하니 크게 쓸 수 없는 인물이오. 그대는 이점을 잘 살피시오.”

당시 유비는 영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는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면서 특별히 마속의 문제를 거론했다. 인재 활용의 측면에서 유비의 안목이 제갈량보다 훨씬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만약 제갈량이 유비의 유언을 명심하여 마속을 참모로만 활용했다면, 그래서 그를 장군으로 임명하지 않았다면, 마속은 분명 자신의 장점을 살려 참모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갈량은 처음 기산(祁山)으로 출병하면서 위연(魏延), 오의(吳懿) 등 전투 경험이 풍부한 노장들을 제쳐놓고 굳이 마속을 선봉장으로 기용했다. 그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속의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하는 악수를 둔 것이다. 결국 촉나라 군대는 수송의 요충지인 가정(街亭)을 잃고 말았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핵심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마속은 처음 선봉장을 맡아 가정을 잃었다. 확실히 응분의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굳이 그를 죽여야만 했을까? 실패의 원인은 마속에게만 있지 않았다. 인재 활용을 잘못한 제갈량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 당시 한 번의 패배로 마속을 죽이는 것에 대해 많은 신하들이 찬성하지 않았다. 그를 죽일 것이냐, 공을 세우게 하여 죗값을 갚도록 할 것이냐, 매우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장완(蔣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를 아직 평정하지 못했는데 똑똑한 책사를 죽이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입니다.”

장완은 마속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을 주장했다. 그때 상황에서 매우 적절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또 다시 사람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마속의 목을 베었다. 그가 마속을 죽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가 눈물을 흘렸건 안 흘렸건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10만의 군사들도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눈물을 흘린 이유는 마속을 존경하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생각해보자. 그런 상황에서 한 장수를 죽임으로써 군기를 엄격히 세울 수 있었을까? 또한 군사들의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을까? 오히려 그들의 사기에 찬물을 끼얹지는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대목이다.

제갈량이 마속을 죽인 사건을 두고 역대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왔다. 진(晋)나라 습착치(習鑿齒-역사가로 《양양기(襄陽記)》와 《한진춘추(漢晋春秋)》의 저자)의견은 이러했다.

“제갈량이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촉나라는 궁벽한 지역이라 인재가 적었는데도 영웅을 죽이고 변변찮은 이들만 등용했다. 엄격한 법 적용이 인재보다 우선했으니 어떻게 대업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인재를 가려 그릇에 임무를 나눠주지 못했고, 선황제의 유언을 어겨 중원 땅을 잃었다. 게다가 유익한 인재를 죽인 건 더욱 그릇된 처사였다.”

사람들 중에는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인재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인재도 있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이 전자에 속하고 무식한 사람이 후자에 속한다. 지식인은 비교적 우수한 자각능력으로 다양한 역할과 환경에 빠르게 적응한다. 물론 개개인의 천성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기민한 적응력으로 천성의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다. 반면에 무식한 사람은 타고난 성품을 고치기가 극히 어렵다. 그래도 그 중에 재능이 뛰어난 몇몇 사람은 잘만 활용하면 특출 난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마속은 유생이어서 약점을 고칠 수 있는 여지가 많았고, 위연은 지식이 짧은 무장이어서 그럴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 그러나 그들은 본래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 제갈량이 적절히 활용하기만 했다면 그들은 큰 인재가 될 수 있었다.

강유(姜維)는 제갈량이 정한 후계자였다. 그러나 장군으로서의 그의 재능은 위연보다 못했고, 책사로서의 재능은 마속에게 미치지 못했다. 훗날 촉나라의 멸망에 얽힌 사실들이 이를 증명해준다. 강유의 재능은 기껏해야 부장(副將)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제갈량은 이런 사람을 국가의 기둥으로 삼아 위험을 초래하고 말았다.

제갈량은 사람이지 신이 아니었다. 현명한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 끝에 한 가지 실수를 할 수 있고, 우둔한 사람이라도 역시 많은 생각 끝에 한 가지 얻는 것이 있다고 한다. 사실 제갈량의 실수는 결코 이상의 사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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