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曙雪)
서설(曙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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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1.15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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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삼의 초대시]

서설(曙雪)

하늘 가득 꿈빛 별마다

눈송이 되어 내리운 새벽

모두어 가슴으로 들어선

曙雪

어느 사이

기둘림으로 녹고

 

한 새벽

보듬어 온 사랑

다시 별 되어 하늘로 뜨누나

사랑,

아-

아- 사랑이여

 

시의 창(窓)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야기에 보면, 한 소년에게 어릴 적에 놀이터가 되어주던 나무가 성장해가는 소년에게 열매를, 가지를, 그리고 나중에는 몸통마저도 주고도 더 주고 싶어 훗날, 노인이 된 소년에게 밑둥만 남은 나무가 그의 쉼터가 되어준다는 내용이 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나무는 주는 것 자체가 행복했던 거라고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이란 이처럼 그렇게 다 주고도 더 주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는,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의 표현이다.

이렇듯 사랑과 행복은 영원 불멸의 함수 관계에 있다.

사랑 때문에 숱한 고난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값지고 귀한 그 사랑을 위해서라면 계속해서 어떠한 역경이나 난관도 헤쳐나가리라고 마음먹는 굳은 신념이 고귀한 사랑 가운데에는 있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사실 사람들은 가능하면 고생 안 하고 편하게 살기를 바란다.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는 일상생활이라면, 누구라도 남보다 더 고생스러운 어떤 삶을 원하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기왕이면 편하고 쉬운 일, 사생활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의 제한된 일 등을 선호한다.

가능하다면 대접 받는 소년의 자리가 더 낫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편에 서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중심에 사랑이라는 진실한 마음이 깃들게 되면 바로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기를 자청하며 헌신의 자리로 선뜻 나서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그늘이 되어주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때로는 가지를 잘라주고, 심지어 몸통까지 주고도 또 주고 싶은 마음,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에서라면 가능한 일이며, 그것이 곧장 행복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이처럼 사랑은 행복의 귀결이라는 진리를 고이 간직하면서 흘러왔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훗날에도, 아마도 영원토록 사랑이라는 이름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행복한 감정 중에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귀한 마음의 느낌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에 와서는 점점 더 사랑이라는 이 제목이 무색해지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이 과연 맞기는 맞는 건가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들이 도처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게 또한 사실이다.

이시대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과학 문명이나 모든 편의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된 시대이지만, 오히려 정신적인 감정이나 행복과 사랑의 표현에는 메마르기 짝이 없으며, 반대급부적으로 오히려 점점 더 퇴보해가고 있다.

낭만이 부족하다보니 자연스레 따스한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채우지 못하는 목마른 시대, 그 자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래서 더욱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된 세대가 바로 오늘의 세대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본질을 제대로 깨닫고 제대로 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며, 행복의 단면만을 바라보지 말고 서로 진심을 나누면서 살자는 것이다.

이런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진실을 외면하며 서로 반목하고 이기적인 욕심으로 대립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탈피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심히 민망한 일일 것이며, 그렇게 제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신나는 인생이 아니라, 이리 저리 몰리다가 급기야는 이룬 것도 없이 그저 스러져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버리게 된다는 걸 우리는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는 것이 어려울수록 더욱 사랑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에 문제가 생기면 여지없이 보는 눈에도 문제가 생겨 불평의 제목과 미움의 내용들이 더 많이 생겨난다는 거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봐도 감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진심이 마음에 들어오지를 않으며 그냥 막연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섭섭하고 약이 오르고.

이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이 관문을 잘 통과해야 한다.

인생 살기가 힘들수록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협력해야 한다.

지나치게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다보면 정신적인 혼돈이 극심한 상태가 되어질테고, 급기야는 현실적으로 서로의 관계 회복이 영영 힘들어 질 것이라는 건 누구나 어렵쟎게 가늠할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보면, 오늘날처럼 퇴폐적이고 환락적인 면만을 추구하는, 그리고 사랑의 아름다운 줄기가 고사되어가는 메마른 사회의 현실이 어떻게 보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정신적인 갈급함과 목마름을 갖게 함으로 결국 참 사랑에 대해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진, 즉 사랑을 나누기에 아주 적절한 타이밍으로 무르익은 세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인들의 삶에 여러 가지 답답하고 황폐한 현실이 있다면 그건 곧 사랑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나눔의 장이며 터전이라고 믿으면 된다.

임시방편으로 순간을 모면하고 당장의 곤란을 탈피하고자 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 자체를 위한 사랑을 함으로 우리의 삶의 색깔은 비로소 더 아름다워지고 더욱 찬연한 빛을 뿜어낼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가슴에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사랑을 행동으로 열심히 표현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서 한층 기쁘고 아름답고 활발한 삶을 살아갈 수있게 될 것이다.

실상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그리 크고 멀리 있는 건 아니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고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하루를 좋은 날로 만들려는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고 나중에 라고 미루며 시간을 놓치는 사람은 불행의 하수인이 된다.

힘들 때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이미 행복의 당선자인 거고 그런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 낙선자이다.

사랑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거고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

작은 집에 살아도 잠잘 수 있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 거고 작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주는 사람은 이미 행복한 사람인 거고 상대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만 섭섭한 사람은 이미 불행하다.

미운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반비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복은 정비례한다.

너는 너,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의 독불장군이지만 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행복연합군이 된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 거고 누구는 저렇게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 마다 수시로 3뻐 (기뻐, 예뻐, 바뻐)의 삶에 대해서 강조하곤 한다.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과 일터와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을 보면 아주 간단한 진리를 공통점으로 갖고 있으니, 그것은 곧 사랑하는 마음을 곱게 간직하면서 감사와 기쁨을 삶의 방편으로 삼고 행복을 만끽하며 하루 하루를 의미있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바라기에는 우리 모두의 삶에서 사랑이 언행의 촛점이 되고, 생활의 촛점이 되며, 삶의 촛점이 되어 오직 사랑을 감당하고 베푸는 일에 힘쓰고 애쓰는, 그렇게 서로 서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 때문에 행복한 우리의 삶이 되어지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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