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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하루하루가 찰나처럼 지나가는 것 같다. 올 한해 잘해보자고 다짐했던 새해가 다음 새해를 목전에 두고 있으니 말이다.

청사 앞 샛노랗게 물들었던 은행잎은 제가 첫 눈인 양 속절없이 떨어지더니 이제 앙상한 속살을 드러낸 채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전에 뉴스에서 잠깐 본 적이 있는데, 겨울을 앞둔 나무들의 잎이 떨어지는 이유가 한 겨울 수분조절과 눈이 내렸을 때 나무에 쌓이는 무게를 줄여 가지가 부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잎을 떼어 낸다는 것이다.

나무 나름의 월동준비인 셈인데, 요즘 우리 집도 그렇고 많은 가정에서 비슷한 월동준비로 바쁘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김장을 담는 일이 아닐까 싶다.

온 가족이 한데 모여 고춧가루, 무채, 젓갈 등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진 소를 절인 배추 포기마다 정성들여 넣으면서 식구들끼리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은 우리 이웃들의 소박하지만 행복한 이맘때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새참으로 내온 돼지고기 수육을 갓 만든 김장김치에 한 입 듬뿍 싸서 먹을라치면 그 맛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가끔 행사로 방문하는 동네의 아주머니들이 그 인심만큼이나 큼직한 김장 배추쌈을 한 입 가득 넣어줄 때면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배가 불러도 없는 식탐이 생겨 한 입 더 달라고 하고 싶지만 체면이 뭔지 다른 일정 핑계 대고 얼른 자리를 떠야 한다.

그런데 내가 맛있게 먹고 있는 김장 속에 어머니, 아니 우리 ‘엄마’의 모습이 그리고 ‘아내’가 떠오른다. 나는 구식세대다. 6·25가 발발한 1950년 그 해에 태어났으니 우리나라의 그간 발전 속도로 보면 구석기 사람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마와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에 익숙하고 집안일은 의례 여자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고 의식과 무의식 어딘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여주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치러지는 크고 작은 행사에는 반드시 다양한 음식이 함께 한다. 비가오거나 눈이 오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를 가나 가스 불을 피우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대형 솥에 수십 명이 먹고도 남을, 집안 손님에게 대접하듯 먹음직스럽고 하나 같이 맛있는 음식이 나온다.

이 모든 음식들은 누군가의 아내로 그리고 어머니인 ‘여자’들의 손길로 만들어 진다. 즐거운 행사장을 뒤로하고 천막 뒤에서 분주히 전부치고 설거지하는 아내들과 어머니들이 부녀회를 조직하여 더위와 추위에 싸우면서 여기저기 전쟁 치르듯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들이 없다면, 한 겨울 동치미 국물 없이 뻑뻑한 고구마를 먹는 것처럼 목이 메고 밤새 갈증으로 시달리게 되지 않을까.

이제는 세월도 변하여 많은 남자들이 집안에서 빨래며 청소며 가사를 돕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처럼 바깥일을 핑계로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내입으로 가져갈 줄만 알았지 ‘오늘 반찬이 맛있다’는 따듯한 말 한마디 던 질줄 모르는 남자들이 많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올 한해가 가기 전에,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책 제목처럼 소중한 엄마에게, 아내에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 해보자.

현실적으로 집안일 하는 것이 어렵다면, 온전히 우리 남자를 남자로 잘 있게 해주고자 하는 그 마음을 알아주는 말 한마디가 평생을 준비하는 월동준비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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