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부두에 몰려든 피난민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는 흥남철수 때 미국의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월남했다. 이 흥남철수의 원인은 미군 사상 최악의 참패, 장진호 전투였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한국전쟁 중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벌어진 전투로 미국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악몽을 남긴 전투 중 하나이다.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평했다. 미군 전사에는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장진호전투는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여기에는 미 해병사단 외에도 국군 7사단이 동참했다.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 목적과 병력규모를 11월 초까지도 경시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선제공격을 단행하기로 결심함에 따라 서부지역을 담당한 미 제10군단 알몬드 소장은 국경선을 목표로 한 북진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11월 1일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1군단을 우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좌측으로 하여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이 무렵 중공군은 미 제10군단 정면에 제9병단을 투입하고 있었다. 제9병단은 예하에 제20군단과 제27군단, 제26군단을 두고 있었다.

11월 27일 중공군이 유담리의 미 해병대를 공격하며 전투가 시작됐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장진호 지역의 전황이 급변하자 미 제10군단장은 11월 30일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계획을 재검토했다. 회의에서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유담리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에 미 제1해병사단의 제5연대와 제7연대가 각각 이를 격파하고 12월 4일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서 고립된 미 제7사단은 구출이 지연되자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하갈우리로 이동했다.

하갈우리에 대한 공격은 중공군 제58사단이 주축이었다. 또한 중공군 제60사단은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하여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 제1해병사단의 분전으로 12월 7일 고토리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함으로써 장진호전투를 마무리하였다.

장진호 전투에는 추운 날씨와 중공군의 엄청난 인해전술 탓에 미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얼어 죽는 병사가 넘쳐났으며 부상자의 이동수단이 부족해 걸어서 이동하다가 사망하기 일쑤였다. 한 부대가 괴멸이 되기도 했으며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굶어죽는 인원들도 발생하였다. 성공적인 후퇴작전의 이면에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피해상황을 보면 미군이 전사 3,937명, 부상 2,152명, 실종 76명이지만 중공군은 5만 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 해병1사단은 부상자 대부분이 동상 환자였다. 당시 개마고원의 장진호 일대는 고도 천 미터 이상의 산악지형이어서 낮 기온이 영하 20여도, 밤기온이 영하 30여도였다.

무기와 차량도 계속 가동시키지 않으며 모두 얼어버렸고 부상자 치료를 위한 링거나 모르핀도 다 얼어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공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장진호 전투는 후퇴했지만 승리한 전투였다.

저작권자 © 서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