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평화롭고 태평스런 시대에 있어서도 위험을 잊지 않고, 질서 속에서도 혼란됨을 잊지 않는 것은, 명석하고 지혜로운 위정자나 국민이 항상 마음 써야 할 일이다. 천하가 안정되어 있더라도 결코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을 소홀히 하면 방위능력은 즉각 저하된다. 안으로는 힘을 비축하고 밖으로는 무력을 정비하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먼 곳의 나라들과도 화친하여 우방으로 삼고, 어떠한 돌발사태의 발생도 막아야 한다. 항상 군사연습을 실시하여, 전쟁을 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여러 나라에 천명(闡明-사실이나 입장 따위를 드러내서 밝힘)하고, 나아가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군인의 군사 연습을 태만히 해서는 결코 안 된다.

병법에서도 말하고 있다. “천하가 태평하다고 해서 전쟁을 잊는다면 반드시 기운다(法曰, 天下雖平, 忘戰必傾).”라고.

당나라 시대 현종 황제의 치세 하에, 오랫동안 천하태평이 지속되어 병기는 녹슬고, 군마는 방목되고, 무장(武將)은 업신여김을 당하게 되어 병사의 훈련은 실시되지 않고, 국방의식이 박약해 져서 국민은 전혀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때 갑자기 안사의 난(安史之亂-755년 안녹산과 사사명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 일어나 순식간에 비상사태로 발전했다. 그러나 문민(文民) 중에 지휘관으로 군대를 지휘할 자가 없었고, 도시주민들은 전법(戰法)을 몰라서 멍하고 쳐다보는 사이에 당나라 제국은 멸망의 벼랑 끝까지 몰렸고, 서울의 문화유산은 대부분 파괴되어 버렸다. 전쟁을 망각한 결과였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 군의 갑작스런 침공으로 쿠웨이트는 붕괴되었고, 왕족을 비롯한 많은 쿠웨이트 국민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등 이웃 아랍국으로 피난했다.

이라크군에 대한 쿠웨이트 국민의 저항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산유국이라는 천혜의 조건하에서 풍요로운 생활에 익숙해 진 쿠웨이트인은 실로 전쟁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에서 피난 생활하는 돈 많은 쿠웨이트인 들은, 나라를 잃어버렸어도 많은 자산을 해외에 투자했음으로 돈에 궁핍하지 않았으며, 이집트 등에서는 쿠웨이트의 젊은이들이 밤마다 호사스런 나이트클럽에서 놀아나고, 고급 승용차를 굴리고 있어서 이집트인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만일 쿠웨이트가 산유국이 아니고, 또한 전략물자인 석유의 이라크 독점을 바라지 않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구원하지 않았다면 쿠웨이트는 이라크에 병합되어 망국의 길을 걸었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이와 대조적인 것이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전개된 소련과 핀란드 전쟁이다. 핀란드는 고립무원인 상황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소련군의 침공을 받으면서도 핀란드는 거국일치로 분전하여, 최후에 힘이 탕진되어 강화에 응하기는 했어도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완강한 저항에 소련으로 하여금 병합(倂合)을 단념시키고 핀란드는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패배를 생각하고 철저히 항전하지 않았다면 핀란드는 발트3국처럼 소련에 병합되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조선조 선조 때 태평성대가 계속되고 문관통치시대가 계속되면서 무관(武官)의 존재가 약세화 되자, 국난을 우려하여 십만양병(十萬養兵)을 주장했으나 조정은 여기에 귀를 기우리지 않다가 왜의 침략을 받아 임진왜란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십만양병설은 그 진위여부는 별론(別論)으로 하고서라도, 설정(設定)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국방과 주변정세를 예리하게 통찰한 혜안과 선견지명이 아니고서는 도출해 낼 수 없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국방이란 한마디로 천변만화하는 오늘의 상황에 대비하고 변화무쌍한 내일을 예측하면서 주도면밀하게 안전지책을 준비하는 것에 최고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천하가 안정되어 있을 때 일수록 전쟁의 위험을 잊지 않고 위정자나 국민 모두가 혼연일체로 항시 유비무환의 자세로 국방에 임한다면 국가는 영원하며 불멸하리라!

저작권자 © 서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