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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본지 논설위원, 전 포스코건설부사장)

가을이다. 고추잠자리가 높이 날고, 들녘의 황금물결과 바람에 일렁이는 코스모스 꽃을 보면 고향의 모습이 ‘아, 세월이.......’라는 말과 함께 다가온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의 속도가 빨라진다고 한다. 시간은 태양과 지구가 만드는 현상을 기준으로 만든 변할 수 없는 단위이다. 일정한 시간이 더해져 만드는 세월이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니 수학적 덧셈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말이다.

어렸을 때는 친구들과 놀다가 ‘야 밥 먹어라. 해지는 줄도 모르니?’ 라는 말을 매일 들었을 정도로 놀이에 빠진다. 하지만 놀이에 빠져 있을 때뿐, 빨리 커서 머리도 길러보고, 담배도 피워보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세월은 얼마나 더디던가? 그러나 어느새 어른이 되고, 생업에 열중하다보면 자신을 돌아볼 겨를 없이 문득 은퇴를 맞게 되는 현실이다. 그리고 노인이 되면 시간은 더디 가고 세월은 어느새 가버린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이에 따라 시간과 세월이 가는 속도를 다르게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재미있는 일에 빠져 있거나, 어떤 희망을 가지고 그 진도를 학인하다 보면 세월은 잊게 된다.

중년의 나이에 들면 ‘시간은 빠르게 세월을 늦게 흐르게’ 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어딘가에 재미있게 몰두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 미래의 어떤 결과를 이루고 싶은 희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퇴직을 하였다거나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핑계로 ‘이 나이에 새삼 도전이라니........’ 라는 말을 앞세워 일상에 안주한다면 시간은 느리게 가고 세월은 유수같이 흐르게 될 것이다. 건강한 노년, 신 중년이 할 수 있는 일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다. 봉사, 공부, 악기배우기, 운동, 텃밭 가꾸기........ 등 찾으면 찾을수록 자신을 변화 시킬 많은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 길러진 인내심, 인맥.......그 모든 것을 새로운 도전의 자원으로 활용한다면 분명히 새로운 지평을 열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 쇠약하여지는 것은 당연하나 품위 있게 늙어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동안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과 사회를 위하여 일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을 위한 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한다.

가을이다. 곡식들이 영글고 과일들이 탐스럽게 익어간다. 영근 알곡으로 고개 숙인 이삭들을 보게 되면, 자연히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모심는 것을 본지가 어제 같은데 알곡의 무게로 굽어진 이삭들, 세월이 만든 결과물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버렸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아니라 다시 채우려는 희망의 동기로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의 삶의 무게와 열기로 숯처럼 탄화되었지만 새로운 의욕의 불씨로 불을 지피면 연기도 소리도 없는 뜨거운 불꽃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퇴직이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다. 오늘은 소비하기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는 시간이다. 긍정의 희망을 품고 배우고, 배려하고, 소통하고, 키우고, 움직이는 오늘을 만들어야 한다. 하는 일에 빠져 시계 보는 것을 잊게 된다면 시간은 빠르게 갈 것이고, 돌아보아 자신이 품고 있는 알곡이 아직 여물지 않았음을 발견한다면 세월이 더디게 가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품은 알곡도 잘 영글고 있는지 확인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한, 세월은 천천히 움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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