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군의 금발 외모를 자랑하던 처녀가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어, 또 다른 내면에 숨어 있던 비극의 정서를 막 끄집어 낼 때, 먼로의 삶은 끝나고 말았다. 유아기와 성장기 때의 슬픔과 어둠이 연기로 더욱 승화될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은 관객의 상상 속에 남겨 놓았다."(103쪽)

"배우로서, 특히 여배우로서 불가능한 대상으로 기억되는 것만큼 부러운 게 있을까? 그는 유령처럼 현실 너머에 존재하고, 죽지 않을 것이며, 그래서 영원히 기억 속에 출몰할 테니 말이다. '현기증'은 킴 노박이라는 배우를 초현실의 존재로 각인시킨 작품이다. 배우로선 이런 영광이 없다. 그래서인지 '현기증'은 그의 연기 경력에서 정점을 찍었고, 이후로는 결코 '현기증'에 버금가는 작품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들 어떤가. '현기증'이라는 걸작이 노박의 작품 목록에 기록돼 있으니 말이다. 이것 하나로도 충분하지 않을까?"(173쪽)

영화평론가 한창호(54)씨가 '여배우들'을 냈다. '씨네21'에 2013년 4월부터 약 2년 간 격주로 연재한 '한창호의 오! 마돈나'에 메릴린 먼로를 추가해 엮은 책이다.

여배우들의 삶과 영화에서 한 발 더 들어가 그들의 정체성까지 조명했다. 대중은 여배우들의 연기보다는 그들의 관능과 스캔들에 주목했다. 미셀 푸코의 말처럼 대중의 시선은 하나의 권력으로 작동했고, 여배우들은 세상이 원하는 시선에 맞춰 자신의 이미지를 연기해야만 했다.

예컨대 먼로는 그렇게도 하기 싫었던 '금발 백치' 역을 경력 내내 반복해야 했다. 그것이 남성들은 물론 많은 여성들까지도 원했던 먼로의 자리, 곧 그녀의 스타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먼로는 자기가 원치 않았던 위치에 있을 때, 더욱 사랑받았다. 저자는 그것을 '타자의 자리'라고 봤다. '타자의 자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대변할 수 없는 지점이다.

총 50명의 여배우를 소개하며 저자는 '여배우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내린다. 저자는 '여배우는 배우'라고 말하며, 권력으로 작동하는 대중의 시선이 여배우들의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희석시켜왔다고 지적했다.

"서스펜스 드라마의 거장답게 히치콕은 성적 매력에도 '서스펜스'가 있어야 한다며, 요조숙녀처럼 보이는 여성이 더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반면 마릴린 먼로나 소피아 로렌처럼 성적 매력이 너무 직접적이면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마치 학교 선생처럼 보이는 여성이 함께 택시를 탔을 때, 놀랍게도 당신 바지의 지퍼를 여는 것이 성적 매력의 서스펜스라는 것이다. 앞뒤 문맥을 봤을 때 그 여성은 바로 그레이스 켈리다."(153쪽)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속된 말로 부자들이 차 바꾸듯 남자들을 갈아치웠다. 청교도적인 윤리를 미덕으로 여기던 미국 사회에서 테일러의 행동은 스캔들이(었)다. 그런데 테일러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결과적으로 그녀의 행동은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에 조그만 균열을 냈다. 일부 남성들의 파트너 바꾸기에 상대적으로 관대하던 미국인들이 테일러의 행동에는 왜 그렇게 불쾌감을 드러냈을까? 프로이트라면 소원 성취를 이룬 '여성'에 대한 살기의 질투라고 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스캔들이란 게, 숨어 있어야 할 사회적 억압의 출현에 대한 신경질적인 집단반응인데, 그렇다면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테일러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문명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불안의 기폭제였다."(126쪽)

"여배우가 젊을 때는 청춘 하나만으로도 승부를 걸 수 있다. 빛나는 육체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이가 들면 어떡할 것인가. 이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고, 여기에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육체 하나만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이 청춘의 화신은, 놀랍게도 중년이 돼서 죽음의 상징이 되어 나타났다. 그렇게 망가노는 배우로서 두 번 살았다."(117쪽)

저자는 "이 책은 '다른 사람에 의해 대변되어야 하는' 여성 스타들에 대한 기록"이라며 "그들이 어떻게 시선의 대상이 되는지, 다수에 의해 소비되는지 돌아봤다. 철저하게 '대변되었던' 마릴린 먼로부터 '스스로 대변'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제인 폰다까지 50명의 스타를 모았다. 그럼으로써 동양인인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반추해보려 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편견을 뛰어넘는 삶을 보여준 여배우들이 가장 고맙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 글이 시작될 수 있었다. 여배우를 바라보는 시각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저자로서 더 이상의 영예는 없을 것이다." 336쪽, 1만8000원, 어바웃어북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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